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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대부고 21회 동기회 Life · Dream ·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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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ING IN THE RAIN !!!

 

                            글쓴이: 정연수 조회:78   날짜:2001/09/10 16:40 ..

 

 

 

이번 산행은 여러모로 생각할 점이 많은 기회였다.

 

그간 많은 산행을 하면서, 매번 무사히 산행을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못 느낀바 아니었지만,

이번 산행은 정말 하느님에게 감사를 거듭드릴 수밖에 없었다.

 

악천후 속에 설악이란 큰 산에 오르면서 우리는 너무 자만과 방심 속에 요행을 바랐던 것이 아닌지.

 

비상사태에 대한 충분한 준비도 부족했고, 회원들의 체력을 고려치 못한 코스선택도 우리들의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더구나 등산경험이 많지 않은 친구들에 대한 배려도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반성도 해본다.

준비품목에 대해 회장이 일부 안내장에 기록했지만, 등산경험이 많은 이들이 좀 더 구체화해주어야 했었더라면

하는 스스로의 반성도 해본다.

서울 근교산행 정도로 가볍게 나타난 이도 있었고, 당일 날씨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고...

 

우리들의 등산이란 것이 친목과 체력단련의 수준을 넘지 않는 바에야 제일로 우선해야 하는 것은 "안전"일 것이니까.

 

비교적 궂은 일을 마다 않고 해온 사람이 이런 얘길하면 생색이나 내려는 속셈으로 오해를 받을까 보아 자제를 했지만,

이번 기회에 너, 나 없이 같이 반성하는 마음으로 말문을 연다.

 

어제도 희운각 대피소에서 점심후의 쓰레기를 나누어 들고 내려온 이는 건강이나 체력이 조금 떨어지는 종만이었다.

물론 나도 쓰레기보따리를 하나 걸머지고, 손도 대지않은 김밥 세개를 배낭에 넣었는데...

 

우리가 떨어뜨리고 온 쓰레기는 식사쓰레기 뿐 아니라 찢어지고 젖은 비옷까지...

정말 우리가 산을 사랑하는 이들인지 아니면 여늬 사람들처럼 무신경한 보통 등반객인지 좀처럼 스스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하기싫은 것은 당연히 남들도 싫어하는 일일테니...

 

정말이지, 인상이의 배낭은 쇳덩어리였고(카메라와 조도기등 쇠붙이로) 조금이라도 무릎에 부담주지 않을 길을

앞서서 점검하느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산행을 했고, 냇물로 덮인 산길을 잃고 여기저기 길 찾느라,

또 랜턴도 없이 일몰시간 전에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지 마음은 어찌나 콩 튀듯 했던지

그리고 빌어먹을 핸드폰은 왜 서비스 지역 아니란 소리만 쏟아내던지 좌우간에 몸고생 보다 마음고생의 하산길이었다.

 

다행한 것은 아니 감사를 한번 더해야 하는 것은 희운각 대피소에서 양폭 산장으로 내려오는 길에 만난 중년의 등산객.

그이에게서 진통제와 맨소래담, 스프레이까지 얻어 응급치료를 할 수 있었고, 소요시간의 두 배반인 두 시간반 동안 헤맨 끝에

양폭산장에서 종만이와 찬영이를 조우한 것은 친구가 아니라 아예 설악의 신선이었다.

찬영이가 인상이 배낭을 메어줬고, 또 진통제의 효력이 발생한 덕인지 인상의 걸음속도도 빨라졌다.

 

풍화, 수영, 영해를 독려하며 늦은 하산을 하고 있던 해창이를 만나니 외로움도 반감.

천불동 비경이 눈에 들어온 것은 신선과 선녀들 만난 후부터니까

당시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었던 지는 여러 친구들도 이해가 조금은 되겠지.

일몰 전에 비선대에 도착해 원 회장과 공중전화 통화를 하고 119구급차 오는 곳까지 와서 한숨을 몰아 쉬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미 종만이와 함께 내려간 줄 알았던 오현이가 나타났다. 헛개비를 본거나 아닌가 하고 모두 놀랐지.

정말 조난 당할 소지를 충분히 갖춘 오현이였다.

준비물도 없고 평소에 산행도 많지 않았던 오현이는 정말 시한폭탄(?)급이었으니까.

 

인상이와 희운각 대피소에서 같이 내려올 때 쉬기만 하면 졸음을 참지 못해 휘각을 귀에다 불어댔는데,

종만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가길래 걱정도 안 했었거든.

호우로 비선대하산길에 로프로 통행금지를 시켜놓아 금강굴 쪽으로 가면 내려가는 길인 줄 알고 거기까지 갔었다는데

다리건너 보이는 휴게소를 놓아두고 금강굴로 갈 정도니 과연 시한폭탄급이란 표현에 이의는 없겠지.

우리를 찾으러 다시 양폭쪽으로 갈 생각도 했었다니 정말 아찔하기 짝이 없다.

 

빗속 허기에 비옷도 없이 밤 동안 체온 떨어지면 결과는 뻔할 뻔자.

 

좌우간 우리의 설악산행은 그렇게 무사한 하산으로 온천욕과 싱싱한 횟감을 앞에 놓고 소주잔 기울이면서

HAPPY ENDING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 피로에 젖어 단잠을 자는 동안 우리를 지켜준 이가 또 하나 있었지.

비안개로 앞이 잘 안 보이는 국도를 기사아저씨 옆에 서 졸지 않도록 우리의 무사한 귀경을 도와준 부근이. 정말 고맙다.

 

그리고 이번 산행을 지원해준 여러 사람들-

동기동창회의 지원금 또 전세버스비용을 부담해준 송 완영, 회원들의 아침김밥을 자비로 챙겨준 박 수영,

비오는 이른 새벽에 점심을 준비해다 준 원회장 사촌,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 자기의 지친 몸을 돌보지 못한 종만이, 찬영이, 해창이 모두에게 감사하며,

매달 산행준비를 원 회장 하나에게만 부담 지운 반성을 제대로 못하고 조금은 비난조로 흐른 글이 아니었나 걱정하면서

오해없는 전폭적 이해를 부탁한다

우리 모두 오래오래 마주보며 추억을 만들어야하니까...

 

참 제목이 왜 DANCING IN THE RAIN이냐구? 히히히.

 

그건 말이야. 무릎 아픈 친구들 계단길 오르내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서 뒷걸음(BACK STEP)으로 계단을 지그재그로 내려오라는 내 주문에

나를 뺀 다섯명이(인상,해창,풍화,수영,영해) 긴 철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아래서 올려다 보면서

이건 정말 DANCING이 아니구 뭐냐란 생각이 들더라구.

사진 한장 못 찍어놓고 혼자만 봐서 아까운 풍경이었지.

그래서 그 얘길 하려다 잔뜩 잔소리같은 거만 늘어놓았다.

그럼 다음번 볼 때까지 안녕.

 

 

 

    설악의 비경에 대한 감격보다 보다 더욱 진한 감격 - '동기회원들의 사랑'

 

                 글쓴이: 최영해 조회:63 날짜:2001/09/10 10:34 ..

 

 

      잘 다녀왔습니다.

 

      9일 새벽 5시에 등반을 시작하여 18시에야 하산을 완료한 장장 13시간에 걸친 등반이였습니다.

      일부 회원은 11시간 정도 걸려 하산을 완료하였습니다만,,,

 

      23명 전원, 대청봉까지 올라가서 구름에 낀 아름다운 천상정원을 보았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뿌연 안개와 빗속에 자태를 드러낸 그 아름다움은 신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내려오지말고 마냥 그 천상정원에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내려오는 길도 장난이 아니더군요.

      그러나 그 힘든? 하산 길에서도 앞에, 위에 보이는 기암절벽과 폭포, 절경을 보면

      그 힘듬도 싹~~ 가시고 탄성이 절로 나오고 힘이 솟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힘든 등산을 마다하고 철마다 오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계절마다, 또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한 설악의 절경은 가히 사람들을 소리없이 취하고 반하게 하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내려오는길, 이인상씨가 다리의 인대고장?으로 걷기가 매우 불편하였으나

      여러 동문들, 특히 정연수씨의 헌신적인 희생과 봉사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이인상씨, 박수영을 포함해서 무릎을 굽히면 통증을 느껴

      제대로 걸을수 없는 저의 걸음으로 오면 아래까지 내려오는데 도저히 시간을 예측할 수 없을것같아

      차가 올 수있는 지점인 비선대 아래까지 내려와 급기야 119 차의 도움을 얻어

      주차장까지 힘들게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 거리를 걸어왔다면 아마 2-3시간이상 더 걸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여준 정연수, 이해창, 손찬영, 박종만씨의 헌신적인 희생과 봉사에 깊이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본인도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풍화, 수영, 나를 염려해 줄곳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은 이해창씨,

      누군들 안 힘들었으랴만 그 와중에서도 가방을 두개씩이나 앞뒤로 짊어져준 찬영씨, 종만씨 고맙습니다.

      혼자서 뒤따라오며 수고하는 연수씨와 인상씨 걱정하며 기다려 힘을 보태자는 찬영씨와 종만씨...

 

      산에 동행이야 누구하곤들 못하겠습니까만...

      이런 친구들이 있기에 언제나 우리는 든든함과 푸근한 인간애, 우정을 더한층 느끼며,

      등산에서 얻는 그 절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과 심취보다, 더욱 진하고 귀중한 동기애와 우정에 대해

      감격을 하였습니다.

 

      이번 등산을 총괄지휘하느라고 동분서주한 산악회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동기회원들에게 맛있는 김밥을 준비한 수영이의 따뜻한 마음과 정성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집단 샤워

 

              글쓴이: 권오현     조회수 : 120  01.09.15 12:12

 

 

      이제야 몽롱하던 정신이 차차 제정신을 찾아 가는군

 

      악몽 같았던 지옥훈련이 하루 지나고

      설악탕에서 집단샤워를 했다는 야릇한 상상을 하니 고통도 잊으채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비선대까지 약 1KM의 설악산 중턱지점에서 조난 2시간 동안의 악몽..

 

      박종만과 헤어지고 나서 뒤에 오는 연수를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군

      에라 모르겠다 비선대까지 가면 되겠지 하고 혼자 외로히 고행을 하였지

      하산하는 다른 등반객이 하나도 없더군. 혼자 가는 길 무지무지하게 재미없더라

 

      아픈 다리를 끌고 천신만고 끝에 비선대에 도착했는데 앞에는 출입금지라는 하얀 선이 두 개나 있어

      사실 난 말이야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는 그런 예의 바른 사람 아니니?

 

      그래서 이정표를 보니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가 0.6KM인 금강굴이더라구

      금강굴까지 가는데 수직에 가까운 길 정말 험하더군

      길도 제대로 돼있지 않고 가는 도중에 난 정말 해골바가지를 봤어 섬뜩하대

      그곳에 더 이상의 시선을 두고 싶지 않아 자세히는 보지 않았지만 동물의 것은 아닌 것 같애

 

      그때부터 두려움이 밀려오는데 더 이상 갈 길도 험난하고 온몸은 빗물에 젖어 춥기 시작하더군

      문뜩 생각나는 게 비선대에 있는 초소가 생각나 다시 내려가 그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등반객이 오면 같이 하산해야지 했는데 초소에 가보니 문을 잠궈 놓아서

      두려움 외로움이 느껴지더군

 

      깊은 산중에서 날 두고 떠나버린 종만이 서방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뒤에 오는 연수도령은 부상자가 있어 하산을 포기하고 세 명의 각시하고 희운각 대피소로

      도로 올라가서 유하는 것 같고 막막하대

 

      그래서 비선대 계단에 올라가 힘껏 불러봤지

      연수야! 짱구야! 해창아!

      그런데 기분 나쁘게 부르면 대답 안 할 것 같애 찬영이혀--엉!

 

      야호라고 불르면 못 알아 볼 것 같아 영해야! 풍화야! 냅다 소리쳤어

      나중에 수영아아! 불를 때는 눈물이 막 날려고 하더군

      얼마나 절박했는 줄 아니?

 

      하여튼 여차여차해서 6명의 조난자를 다시 만나게 됐는데 난 반가워서 연수하고 포옹이라도 할려고 했더니

      버럭 소리를 치며, "너 이디 갔다 이제오니"하며 ZIRAL을 하대

      그래도 해창이는 다정하게 얘기해주니 정말 고마웠어

      조금있다 백마를 타고 오는 흑기사 오부근이 나타나는데 야 정말 멋있대...

 

      상황 끝!!!

      아 설악이여!

      비(내리는) 선(남선녀) 대(중탕)이여!

      혼성샤워 생각하다가 큰일 날뻔 했네

 

 

 

 

 

     설악산 산행의 실체

 

                글쓴이:손찬영 조회:74 날짜:2001/09/13 16:51 ..

 

 

      너무오랜 만에 글을 쓰려니 약간은 서 어 먹 하지만 꼭 밝혀야 할 몇가지 때문에.....

      사실인즉슨 다른 친구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 힘들어서 맨 뒤에 처저서 오다 보니까

      박수영 임풍화 최마담 이인상 권오현 안드레아 이해창 등을 만났고, 본의 아니게 배낭을 건네 받으면서

      속으로 얼매나 원망 스럽고 내가 왜 여기에서 어물쩡 거리다가 이런 웬수 덩어리를 짊어지나 하며

      씨부령 거렸는지 집에 와서 잠꼬대 까지 하였어,

 

      절대로 뒤에 오는 친구들이 힘들까봐서도 아니요 의리도 아니오 나는 그냥 그날 운이 억수로 없었든 꼬마 였었다네.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카페에 올린 글을 읽고 양심이 찌르르하여....

      그날 정말 고생한, 알고있는 몇가지 진실을 알리고자 왔음.

 

      인상이의 처절한 살기 위한 몸부림은 정말 감동이야,

      산을 오를 때부터 다리가 이상이 있었으니 다른 친구들 한테 얼마나 미안 했으며

      배낭 속에 있는 미놀타 카메라는 얼마나 무거웠겠니 ( 디게 무거움),

      1km는 왔을거라 생각 했는데 200m밖에 안 왔고 , 어쟀든 무지깡 혼났을 거다.

 

      그리고 권오현 에피소드 ,,,

      설악산 좋지 하고 럴럴 라라 하고 버스안에서부터 알아봤다,

      다른 언니 오빠들은 새벽 등반을 위하여 힘을 비축하시느라 잠을 청하는 데

      지가 무슨 카사노바라고 여기저기 여자동문 들만 찼아다니면서 소근 소근 하며 한잠도 안자고

      버스안에서 기운을 다 빼고 ,,,

 

      아니나 다르리 올라가면서 부터 헉헉 대더니 맨 뒤에 처저서 온 것까지는 좋은데,

      앞에 간 줄 안 네가 , 또 그렇게 힘들어하던 네가 , 금강굴은 무엇이며 백담가는 무에냐,

      그 먼 데까지 가서 다행이 다른 등산객을 만나 다행이 우리를 만났으니 ,,,

      그때의 네 기분이 어땠을까 , 아마도 환희, 안도감 , 반가움 뭐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반가움에 너는 어쩌구 저쩌구 떠드는데, 기껏 우리한테 들은 소리는 X도 모르는 놈이 어쩌고 하는 소리 들었을때 ,,,        나 같으면 울었다, 시끼들 해가면서,

      어쨌든 고생 했다, 다음부터는 누님들이 쉬면 쉬고 자면 같이 자고 그래라 다 뜻이 있는 거란다.

 

      다음은 김만철

      너는 돈 좀 벌었다고 약간 소문이 났는데 그게 아닌가벼.

      등산화 좀 좋은것으로 사지, 대청봉을 오르기도 전에 신발 밑창이 떨어저서 끈으로 묶고

      내려오는 길은 네발로 기어서 ,,

      처절한 생존을 위한 드라마 의 한 장면 이더군. 만나는 사람들 마다 혹시 신발 여분 있으시면 하고

      물어보는 네가 정말 안쓰러웠음 , 바지는 이상한 땀복 같은 걸 입고 왔으니 척척 감기니까 칼로 잘라내고,,,

 

      다음은 사우나 사건

      맨 뒤에 하산한 사람만 같이 목욕탕에 같는데 옷은 말려야겠고 주인 아저씨는 눈을 부릅뜨고 있고.

      상황이 옷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에서의 사대부고 친구들의 눈부신 요령들

 

      권오현 --- 아예 옷 벗는 척하고 옷을 입고 탕에 들어가서 입은 채로 비누칠과 빨래를 했음 그리고 꼭 짜서 ,,,

 

      정연수 -- 아저씨한테 잘보이려고 빤스를 제일 비싼거로 하나 샀음 (참고로 남탕에서는 내의를 판매함)

                그리고 다 젖은 바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만 헤어드라이기로 말렸음 ,

                주인아저씨도 속옷 판 게 있어서인지 가만 있더라고.

 

      손찬영--- 워낙에 키가 남 다른 데가 있어 바지를 둘둘 말아서 꽉 쥐니까 주인이 못 봤음.

                가지고 들어가서 대충 빨아서 사우나 도크에 널어 놓았음 ,

                그런데 어떤 사람이 도크에 들어가서 물끄러미 처다보구 있길래 ,

                저놈이 혹시 주인에게 일르지나 않나하고 마음 졸이는데 , 나중에 보니 그것이 박종만 선생 이야 ,

                아마도 많은 갈등을 느꼇을 거라고 생각해. 저도 할까 말까 하고,

 

      그리고 종만이형. 정말 고생 무진장 했어 무척 힘들어 했는데 뒤에 남은 친구들을 꼭 기다려서 같이 가자고 했거든 ,

 

      그리고 인상이. 배낭을 메고 빨리 가서 연락 한다고 혼자 내려갔으니 오죽 했겠어

                     나는 솔직히 배낭이라도 떠 맡을까봐서 슬쩍 갔으면 했거든 ,

                     그런데 종만이가 얼마나 근엄 한지 다 알지? 그냥 깨갱 했지

 

      이것이 대충 진실임을 고지 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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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실 때 잘 해드리자구요

 

                              글쓴이: 최영해   조회수 : 60   02.01.19 12:49

 

 

 

오늘 아침 권오현씨의 부친상을 접하면서 우리 나이가 나인지라

부모님들이 연로하셔서 언제 세상을 하직하실지 모르는 동문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된다.

시부모님과 친정아버님을 오래 전에 여의고 이젠 친정어머니

한 분만 남으셔서 그런지 부모님, 아니 노인들 삶의 소중함이 더욱 느껴진다.

 

최근 친정어머닐 모시고 매달 나가는 바람쐬기에 나섰는데

날씨도 추운 겨울인지라 멀리 모시고 나갔다가 혹여 고생을 할까 봐

막냇동생 집에 모여 노는 것으로 이달의 행사를 대신하기로 하였는데

어머니는 벌써 며칠 전부터 우리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계셨다.

 

방앗간에 가래떡 두 말을 주문하셔서 그걸 네 딸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시려고

벌써 가까운 방앗간에 가셔서 대기하고 계셨다.

갓 뽑아 김이 설설 나는 떡을 행여 누구한테 더 갈까 봐^^ 똑같이 8키로 정도 되는 떡 네상자를,,,

 

"엄마, 이렇게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어. 괜찮아요." 해도 막내 집에 모여

동생 몫에서 꺼내먹는 상자에 당신이 가져갈 작은 몫에서 또 넣어 주신다.

요즘에야 한 두 번 먹고 말지 누가 그리 많은 걸 다 먹겠느냐만

어머니 생각엔 그래도 혹여 누구네 집에 덜 갈까 봐 걱정이 되시나 보다.

 

별 일없이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 받는 것이 낙이신 어머니,

그래, 누군가와  말 상대가 되는 것이 좋으셔서, 병원가시는 것이

아퍼서 라기 보다는 사람구경?하러 가시는 목적도 다분히 있으시다.

 

바로 윗 층에 아들며느리가 있어도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할 것이고,

또 같이 있어도 아들과 며느리가 함께 있는 시간은 딸들과 함께

있는 시간과는 자못 다를 것이다. 노인들만 모여있는 노인정은

싫다시며 아예 갈 생각도 안 하신다.

정말 우리어머닌 딸들과 바람 쐬러 다니는 낙이 무엇보다도 삶의

활력소가 되시는 거 같다.

 

몇 년 전 언젠가 엄마 집에 갔더니 빈방에 웬 휴지와 티슈상자가

그리많던지,, 엄만 그걸 딸들에게 어서 가져가라고 하셨다. 혹여

아들며느리가 볼까 쉬쉬하시면서.

 

나중에 알았지만 한때 TV에서도 방송했던 노인상대 바가지 상품 파는 곳에서

가져온 것이였다.

바가진 줄 알면서도 거기가 계시면 시간이 잘 간다고 하셨다.

쓸데없는 곳에 가신다고 자식들에게 야단?맞으실까 봐 몰래 가고,

또 딸들한테는 좋아서 산 것이라 하시며 어여 가져가라고.

 

언젠간 사위들에게 통풍이 잘되는 지압양말이라고 주셔서 남편은 감격하였었다.

노인네가 이런 것을 고르려고 얼마나 다니셨을까 하며

그 정성?에. 신을 수가 없어서 결국 버리고 말았지만,,

벌레가 안 나는 특수항아리, 전자 지압기 등이 다 거기서 산 것이였다.

그냥 구경만 하는 것이 미안해서 인사로 산 바가지상품들.

 

난 그때 TV를 보던 우리아들이 하던 말, "외할머니가 그런데 간 건

엄마 잘못도 커. 자주 안 가 보니깐 그렇지".

난 아들한테 뒤통수를 얻어맞는 거 같은 기분였다.

 

지난봄에 시골엘 모시고 갔었는데 어머닌 안입 는 옷을 한 보따리 가지고

가셔서 동네아낙들에게 나누어 줘야겠다고 하셨다. 우린 그래, 나누어

주려면 살아 생전에 주는 것이 좋다고 하였고. 그 펼쳐진 옷들을 보고

나와 언니는 깜짝 놀랐다. 한번도 입어보지 않은 상표도 그대로 붙어있는

새 옷들 이였다.

 

어머니가 동네 양품점에 잘 가 시간을 보내시고 또 그 집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옷을

사들였는 줄은 몰랐었다.

 

그때부터 우린 차라리 동네 친구할머니를 사귀어서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가서 구경하고 점심도 같이 잡숫고 오라고 정보를 주었었다.

그것이 바가지 쓰는 것보담은 차라리 시간 보내고 구경하기에 낫다고.

그래, 키우실 땐 그저, 아들 아들 하시면서 아들위주로 모든 것이 돌아갔고

우리 딸들은 거져 덤으로 자랐던 거 같은데.

아들도 그저 맏아들 맏아들 하시면서 맏이한테는 지극정성을 다하셨지.

 

그런 아들들이 어머니의 외로움을 알까?

안경을 써도 침침할 눈에 그래도 시간을 떼워볼 양으로 이것저것

읽어보시는 책들, 난 그 책들을 보면서 그래,,, 노인의 삶도 삶이다.

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다 늙어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를 노인이 서예다, 수공예다 배우러

다니시던 것이 시간을 떼우려는 것만은 아닐진대, 그분들, 노인들의 삶도

삶인 것을 우리는 가끔 잊고 사는 거 같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 노년세대들이 많아질 것은 불 보듯한 데

우리는 또 우리사회는 노인들의 삶의 질을 위하여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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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털 유감

 

                            글쓴이: 김형규    조회수 : 58   02.01.27 20:06

 

 

 

난 애들이 둘이다.

큰애가 딸, 오년 뚝 떨어져 느즈막하게 아들 그렇다.

큰애는 집 떠나 기숙사에 있지만 아들녀석은 아직이다.

 

딸애는 내가 한국어를 직접 가르쳤고,

한인타운 근처에 더듬거리며 간판을 읽어내려 가는 것이 기특해서

제법 시간을 할애하며 가르친 덕분에 이젠 잘 읽고,

가끔가다가 받침이 좀 틀려서 그렇지 쓰기도 곧잘 쓴다.

 

문제는 아들 녀석이다.

 

원래 애 키우는 것이 그렇듯이 첫 애가 신경 쓰이지

둘째는 관심을 훨씬 덜 받고 자라게 된다.

 

다들 그랬겠지만

첫 번째가 수두를 앓을 때면 난리 법석을 치지만,

둘째 놈 때는 훨씬 느긋하다.

“다 그런 거야, 열 내려 주고, 긁지 않게 해주고, 좀 있으면 나아!” 뭐 그런 식이다.

 

이 불쌍한 놈이 그래서 한글도 배우다 말았다.

말만 알아듣지 쓰질 못한다.

그래도 내가 한 2,3일 가르쳐준 것을 전 재산으로 해서 더듬거리며 읽어나가는데

참고 듣기에도 답답하다

게다가 학교에서도 전혀 한국말을 안 쓰지, 부모는 바쁘다지,

기회가 주어 지지 않는 것이다.

 

주말 한글학교에 보냈더니 이상하단다.

왜 선생님이 백목을 학생들한테 던지냐고. 이래저래 한글과는 인연이 안 닿았었다.

그래도 신통한 것은 일상용어를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엄마와는 아주 잘 통한다.

 

엄마와의 대화는 영한 짬뽕인데 주로 이런 식이다.

 

“Mom, where ‘s the new cereal that we bought today?”

“응. 부엌 벽장 두 번째 열고 밑에 보면 있어 . 먹고 잘 닫아놔 알았어?”

“OK, but we almost ran out of 우유”

“알았어 낼 사올게”

 

미국 애들이 보면 신기하단다.

영어로 묻고 한국어로 대답하고 각자의 언어로 말은 하는데

듣기는 또 다 알아 들으니 한 언어 밖에 모르는 애들은 이해가 안 갈 밖에..

 

1년 전 겨울의 어느 날 이놈이 사고를 쳤다.

여기 날씨는 겨울도 따뜻하기 다반사인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것이다.

엄마는 감기 걸린다고 따뜻한걸 꺼내서 깔고 피고 하면서 준비를 했다.

 

다음날 아침에 엄마가 물었다.

“안 추웠지?”

“No, Mom 쉽털 was good”

“뭐? 뭐라 구!” “……”

아내는 어젯밤 양털조각으로 만든 sheepskin 이불을 꺼내서 덮어 주었던 것이다.

 

등교시키고 난 후 그 얘기를 전해주는 아내는

“나쁜 애들 한테서 한국말 욕을 배웠구나 순간 철렁 했다가 다시 돌아 왔단다”

 

올해는 겨울이 가기 전에, 안 배우겠다고 고집 부리기 전에,

둘째 놈 한글이나 확실하게 잡아 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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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글쓴이: 김형규    조회수 : 61  02.02.01 07:22

 

 

 

얘들아!

동갑내기란 무서우리 많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거여.

정말 lotus 님이 올린 “우리 어렸을 적에” 너무너무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거드라구.

정말 그랬어 난, 아니 우리는 정말 그렇게 놀면서 지냈었어.

지금의 컴퓨터와 전자오락 기구가 아닌 그야말로 주위에서 줏은 걸 도구로 해서 놀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어찌 그리 재밌게 놀았는지 … 자치기에, 다방구, 딱지치기, 구슬치기 , 말타기 에, 여자들은, 고무줄, 공기 등

저녁밥 먹으라고 부른 지가 한참 됐는데 너무 어두워서 못 놀 때까지.

정말로 살찔 틈이 없었다니까. 생각나?

 

어느 날 우연히 동갑내기와 어릴 적 애기가 나왔었지

 

어릴 적에 놀던 놀이며, 사먹던 과자며 , 눈깔사탕에다 , 학교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그 뭐더라?

설탕을 불에 녹여서 소다 넣고 부풀려서 납작하게 한 다음 별 모양을 찍어 놓으면 공짜로 하나 더 받아 먹겠다며

옷 삔에다가 침 묻혀 가면서 이조백자보다 더 조심스럽게 다루던 것들…

늬들도 생각나지? 그치! 응?.

얘기 하는데 한 삼사십 분 시간이 금방 가더라구.

 

우린 서울하고도 사대문 밖에서 살았었어.

그땐 거기를 서울 보통시라구들 빈정대며 부르기도 했지

논도 있었고 비포장 된 도로에다가 비오면 장화신고 다니구.

그래두 거기가 내 어릴 적 추억의 고향이야.

 

정월 대보름날에는 쥐불놀이하구, 썰매타구,(전승현 스케이트 나오기 전 얘기야)

손발이 꽁꽁 얼어도 집에 갈 생각도 안 했다가 배가 고파서야 집에 가면

우리 엄니 하신 말씀 “얘야! 아랫목에 오기 전에 윗목에 한참 있다가 와!” 하면서 꽁꽁 언 발을 손으로 만져주곤 했지..

 

굳이 곤충채집 숙제가 아니더라도 잠자리채 들었다 치면

우리동네 미나리 밭이 박살이 나는 날이었지 왜..

 

시발택시 처음 나왔을 때

휘발유 배기가스 냄새가 신기해서 맡으며 따라다니기도 했구

새나라 택시 첨 타보니까 과장 쬐끔하면 구름 위를 나르는 손오공의 양탄자를 탄 기분 이드라구 생각나?.

 

쪼금 전에 애기한 동갑내기 얘긴데 알고 보니까 부고를 쳤다가 안 됐었었대.

almost 동기 더라니까.

 

인제 그거말구 조용히 놀던 얘기 해볼까?

만화가게 얘기가 나왔었어.

그땐 거기가 동네의 유일한 학문의 전당이었쟎아 왜?.

 

“라이파이” 애기를 하니까 “제비양”을 금방 생각해 내더라니까!

“젯트호에서 폼 나게 줄타고 내려오는 라이파이며 절벽의 동굴에서 멋지게 출발하는 제비호 하며,

또 “칠성이와 깨막이” 로 가니까 눈이 빤짝 거리더라니까.

밥 시간이 아니었으면 한 3-40분 더 갔을걸 아마?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같이 살아 간다는 것은

정말로 무서울 정도의 공통점이 있는 거드라구…

 

벌써 잘 시간이야. 밤이 늦었네. 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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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이기는 부모 있겠습니까?

 

                       글쓴이: 남견우 조회수 : 61     02.03.07 12:57

 

 

 

며칠 전 강원도 홍천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놈의 소대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댁의 아들 남 원준이를 책임지고 있는 소대장입니다.

원준이가 동티모르에 파견되어 있는 상록수부대에

지원을 했는데 부모님이 동의를 하시는건지

확인하기 위하여 전화를 드렸읍니다."

 

갑작스런 전화에 일단 안 된다고 말했는데 그 후 아들놈이 계속 전화해

자기는 전투요원이 아니고 통역요원이니까 꼭 좀 가게 해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결국 나도 자식한테 이기지 못하는 부모가 되고 말았다.

 

내년 3월 2일이 제대니까 정확히 말하면 군대생활이 1년도 안 남았고

보직도 행정병인데다가 4월에는 2번째 정기휴가가 예정되어 있고,

더우기 밑에 쫄병(?)도 좀 있으니 나머지 기간동안 그냥 편안히 지내다 제대 했으면 하는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결국 놈은 어제 서울 모처에 있는 특수부대로 한 달간 ㅇㅇ훈련을 받으러 입소하였다.

 

ㅇㅇ훈련이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 현역 시절 그 부대 출신 친구들한테 들어 익히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남들은 이런 훈련 서로 안 받으려고 애쓰는데

이놈은 어떻게 된 놈인지 자진해서 받겠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너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집사람은 아들놈 군대 보내고 마음 졸인지가 엊그제인데

또 훈련병보다 더 힘들다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지 하루 종일 말이 없다.

 

원준아!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났으니 이제는 어쩔 수가 없구나.

아무쪼록 몸 건강히 훈련 잘 받기 바란다.

동티모르에는 말라리아나 풍토병이 무섭다는데

군에 처음 입대한 심정으로 매사에 조심하기 바란다.

 

자식놈들이 부모 속썩이는 방법도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구나 생각하며...

 

PS : 군대 얘기해서 어쩌나...

.......울방 여인들이 이해해 주려나...

.......그래도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는 아니니까.

 

 

 

 

 

        Re:자식 이기는 부모 있겠습니까?

 

                          글쓴이: 한대교 조회수 : 45     02.03.07 18:40

 

 

 

         천하에 애정이 최고라고 하는 고수께서도 아드님에겐 별 수 없구나

         나도 내주엔 둘째 녀석이 입대하여 벌써 마음이 평화롭지않은데-

         하기사 대한의 남아라면 거치는 관문

         이제는 우리 때하곤 또 다르니까

 

         그리고 이젠 그만 둥우리에서 벗어나 비상하는 방법도 익혀야 할 대한의 남아들이므로

         애정천하 아드님의 장도를 빈다.

 

 

 

 

        Re:자식 이기는 부모 있겠습니까?

 

                  글쓴이: 송보호    조회수 : 48     02.03.07 13:48

 

 

 

        장한 아들을 두셨군요.

        분명히 잘 키우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건강하게 안전하게 다녀오기를 바라며...

 

        중학교에 이제 들어간 우리 아이는 군대가는 이야기만 나오면 겁을 먹고

        어디서 들었는지 나 군대갈 때쯤이면 엄마 나이가 많아서... 하더군요. 혹시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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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의 언쟁

 

                      글쓴이: 권오현   조회수 : 67   02.05.25 23:10

 

 

 

어제 권철헌 조합장과 서울 일원동 삼성병원 영안실에서 그와 극도의 언쟁을 벌인 내용을 말씀드립니다.

 

그는 환경보호를 위해 개발의 부당성을 피력하는중

“앞으로 개발은 자제되어야 한다““

“산림은 무조건 손상해서는 안된다” 고 하면서

북한의 김일성이 산의 나무를 베고 농토를 만든 결과 북한의 극심한 홍수 피해가 발생 된다며 열변을 토하더군

나는 그의 위세에 눌려 별 말을 하지 못하고 그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말은 온당치 않습디다.

 

권조합장과 영안실 도로를 걸으면서

참 시설 좋다고 감탄하는 이 일원동 삼성병원 자리는

한 10여년 전에 대모산자락으로 쓸모없는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 대표적인 혐오시설이라는 장례식장이 건립 개발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에 홍수피해가 발생합니까?

나무를 베어내 병원을 지었는데 환경이 극도로 나빠졌습니까?

반대로 우수한 조경으로 더 쾌적해졌고 더불어 더 많은 지역발전이 있었어요

 

권조합장은 삼양동 재개발 아파트를 작년에 사서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재개발을 하기 전의 삼양동은 서울시의 대표적인 달동네로서

다닥다닥 게딱지 같은 무허가 건물에.... 꼬불꼬불 좁은 도로에....

불이 나면 대책없고, 노상방뇨는 보통이며 전체가 공동 화장실로 극도의 열악한 주거 환경이었으나

 

현재 재개발이 완료된 지금 이 시점에는 큰 도로가 뚫리고 현대적인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북한산과 잘 어울리는

그러한 쾌적한 주거지로 변모 하였어요.

그는 개발 된 후 삼양동 SK아파트의 환경이 좋아 그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그는 광화문 도심재개발지역의 조합장으로서 개발사업에 몸담고 있고,

또한 개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개발은 부당하다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습니다.

 

 

개발계획에는 환경,조경,교통,상하수도,주민 편의시설등 제반사항을 검토 하여 모든 사항을 합리적으로 하는것이 개발사업입니다.

 

"나무는 무조건 베면 안된다"

"도로는 절대 만들면 안된다"

"건축물은 지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

마치 환경을 보호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또 이에 무조건 동조하는 사람들.......

 

 

아파트 단지에는 통상 30%의 면적에 조경을 하게 돼 있어요

그것도 잡목이 아닌 조경수목으로

또 물 흐름을 바로 잡아 곳곳이 수량을 계산하여 하수로를 설치합니다.

거기서 나온 물은 자체정수처리하거나 폐수처리장으로 보냅니다

수질오염도 될 수 없고 홍수가 나서 떠내려 갈 염려도 없습니다

 

북한의 금강산댐의 과도한 물 흐름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든 평화의 댐도 개발사업입니다

버려진 산에 경제성 없는 무성한 잡목을 잘라내고 임도를 내어 산불방지를 하며

수종을 개량해 주는 것도 산림개발 사업입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얼마나 여러 환경이 열악 했었습니까

우리 그때로 돌아가서 그 당시 환경에서 지금 살라면 불편해서 살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 거의 생활필수품으로 되어 있는 자동차를 매연이 발생된다고 해서 자동차 없애고 걸어 다닐래요?

 

난 환경의 중요한 점도 알고 있으나 개발을 막아 가면서 무조건 환경만 고집하는 데에는 반대합니다.

 

서울외곽순환도로는 북한산을 통과 못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 몇 년 동안 도로의 기능을 못하고 있으며

바다의 간척사업은 환경파괴행위 이므로 안 된다고 하여 몇몇 간척사업이 발목을 잡혀 있습니다.

내 앞에는 아파트를 지을수 없다고 하여 공사를 못하고 방치된 곳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는 그 안전성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여도 무조건 안돼..

자기들이 배출하는 쓰레기도 그 처리장은 우리 동내에는 설치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

 

개발을 하면 열 가지가 분명히 좋아집니다

그러나 개발에 따라 한 두 가지는 불편한 점이 발생 될 수 있습니다

일부 불편한 점이 발생 된다고 해서 열가지가 편리하게 되는 개발을 포기 하겠다구요?

 

이글을 쓰면서 많은 사람의 반대가 있을 것으로 예견 됩니다만

 

개발은 환경파괴가 아닙니다 서로의 보완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완해가면서 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합니다

그러나 개발에 따른 이득을 절대 소홀히 할 수는 없기에

개발에 대해 무조건 반대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삶의 질은 향상 되어야 하기 때문에......

 

 

 

 

        동감 그러나 이것만은,,

 

                    글쓴이: 최영해    조회수 : 59   02.05.26 14:58

 

 

 

         국토를 보다 아름답고 쾌적한 환경, 편리한 교통과 주민편의시설, 백년대계의 토목사업등등 국토의 개발은

         당연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질도 향샹되어야만 한다는것에는 절대적인 동감입니다.

 

         다만 그 개발이 균형 잡힌 개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발업자들의 감언이설에 휘둘려 또는 어느집단/지역의 이익만을 위하여 국부적으로 계획된 개발이거나,

         범국가적/지역의 계획이 있다하더라도 그 계획이 가장 보편적이고 완벽한 객관성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혹여 수정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때, 객관적인 좋은 방향으로 수정 보완되는 것이 아니고

         개발업자나 지역주민들의 이해득실에 의하여 수정되어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관련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과 사고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관련개발업체들도 개인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참다운 국가개발에 참여, 공헌한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책임을 보다 더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제 짧은 소견, 오해가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Re:영안실의 언쟁

 

                     글쓴이: 차은령    조회수 : 60    02.05.26 09:52

 

 

 

         일요일 아침 카페에 들어왔다가

         들장미 향기 만발한 5월을

         더욱 싱그럽게 만드는

         오현씨의 산뜻한 글을 보았습니다.

 

         무조건 동의!

 

         사실 가끔씩 제주도에 갈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무조건 방치해두고

         관광객유치만 하려는 공무원들의 사고에 분노를 느낄때가 많습니다.

         물론 지역적으로 아름답게 가꾼곳도 많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개인적으로 제 남편도 인위적으로 가꾼 공원보다는 야산으로 내버려둔 분위기를 더 좋아 합나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들이 다니는 통행로와 그 주위를 어느 정도 정리해 주는것이 더 쾌적하지 않을까요.

 

         남의 나라에 여행을 많이다니다보면

         잘 정돈된 주위환경에 전율을 느낄때가 많지요

         물론 어딜가나 도시는 어느정도 번잡스럽고 지저분 함을 감수해야만 되겠지만서도.

 

         말이 길어질까봐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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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psite Bear

 

                                           글쓴이: 김형규    조회수 : 50  02.08.27 00:52

 

 

 

곰들 중에 캠프사이트 bear 라고 하는 별명을 부친 곰 놈들이 있어.

아주 게으른 곰 놈 들이야.

먹이 찾아 돌아다니기 귀찮으니까 camp site 근처에 와서 살고 밤에 자주 내려와.

이 놈들은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들을 뒤져서 먹는데. Ranger 들이 절대로 음식을 밖에 내놓지 말라구 부탁해도 .

실수로든, 몰라서든, 내놓고 자는 것 찾아 먹는데 도가 통했어.

 

Ranger 들이야 항상 그러지.

야생동물들이 사람 음식 먹게 되면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훨씬 빨리 죽는다고.

제발 조심해 달라고.

사실이래, 하기야 조미료 방부제 들은 사람의 음식들이 천연의 생식에 어찌 비교가 되겠어?

 

게다가 이놈들은 사람을 맛닥드려도 아주 태연하고 천천히 움직여.

나도 한번 큰 놈을 초저녁에 맛닥 드렸는데 눈만 껌뻑껌뻑하면서 우리 텐트 바깥쪽에서 냄새를 유유히 맡아가면서

천천히 사라지더라니까.

 

야생 곰은 멀리서 사람 냄새만 나도 도망가서 며칠을 개를 풀어서 좆는다는데 이놈들은 반대야.

사람냄새가 나면 밤에 내려와서는 음식을 찾아 먹곤하지.

 

우리 애들 초등학교 다닐 때니까 10년도 더 지난 한참 전 일이야.

 

쎄코이야 국립공원의 캠핑장에서 tent치고 camping 한적이 있었어.

한 두 camp site 건너서 푸에토리코에서 온 친구들이 camping을 하고 있었지.

원래 놀기 좋아하는 낙천적인 기질의 그 쪽 사람들은 맥주가 주식이다시피 하니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원래는 공공장소에서의 주류 소지, 음용은 불법이지) 차에다 감추어 놓고 꺼내 마시다가 밤은 깊었고,

텐트는 차 안에 맥주 실을 장소도 부족할텐데 가지고 오기나 했겠어?

그냥 차 안에 들어가서 자기로 한 거지

작은 pickup truck 안에 실고 온 수박이랑, 맥주랑, 기타 안주 거리들을 차 밖에 내어 놓은 후

차 안에 들어가서 잘 생각을 한 모양이라.

 

게다가 이 내어놓은 음식도 원래는 곰이 못 열게 되는 두꺼운 철판으로 된 사물함 같은데다가 넣게 되어있는데

술도 거나한데다가 그런 게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겠지.

밖에 그냥 내 놓은 채로 한참을 자다가 한 세시쯤 됐나? 화장실 가러 차 밖으로 나올 수 밖에.

나와보니 곰들이 자기 차 바로 옆에서 완전히 파티하고 있었다는 거지.

 

나 그때 우리 텐트에서 자다가 (한 3시경) 듣기에 뭐가 빼애액! 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자동차 시동소리가 나더니만

그냥 혼비백산한 상태로 도망가더라구. 사실 그 새벽에 집채만한 곰들을 바로 옆에서 맛닥드렸으니 안 그렇겠어?.

 

새벽에 Ranger 들이 오고 피해상황이 어떤가 조사하고 있길래 가봤어.

사람은 상한 사람이 없는데 바깥에 내어놓은 음식들은 죄다 상했더구먼.

그 중엔 몇 개의 맥주 깡통까지…

 

어! 정말이야, 곰이 맥주 마셔!,

내 눈으로 봤냐구? 본거나 다름없이 알지. 어떻게 아냐구?

한 너 댓 개 되는 깡통에 발톱으로 뚫은 자국이 있는데 깡통은 몽땅 다 비어있고.

밑에 땅에 흘린 맥주자국은 몇 방울 안되거든.

그 새벽에 증발할 기온도 절대로 아닌데 그게 어디로 갔겠냐구?

 

그날 밤 그 놈들 취해 가지고는 “ 만고 강산! 유라아…암 할쩨! 끅! ” 하면서 비틀비틀 돌아갔을 꺼야. 틀림없이.

 

아주 속세에 물이 많이 들은 타락한 곰 놈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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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만원

 

                   글쓴이: 유성희 조회수 : 63     02.09.02 00:18

 

 

 

"형님, 누가 매일 백 만원을 준다면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으세요?"

집에 놀러 와서 저녁을 먹고 치우며 동서가 물었다.

백 만원, 백 만원이 나에게 큰 의미였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한동안 학교만 갔다 오면 매일 들여다 보며 공상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었다.

가정생활 대백과라는 책, 주 생활 편에 이상적인 주택의 샘플이 사진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아래층에 거실과 부엌, 안방과 손님방, 윗층엔 아동방 셋이 있었는데 방마다 예쁜 침대가 하나씩,

책상과 꽃병까지 놓인 책장이 있었다.

넓은 정원엔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고 햇살이 가득한 거실엔 고급 소파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 집 속에 빠져서, 백 만원이 생기면 꼭 이런 집에서 살아야지 하고 마음 먹었었다.

그 당시 나에게 백 만원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거액이었다.

 

대학을 다니던 때였을 것이다.

그 때 우리나라엔 빨간 퍼블릭 카가 거리를 다녔었다.

나는 원치도 않은 교대에 들어가 대강대강 공부하고 삶의 방편으로 몇 년 간만 교사 생활을 하리라 마음 먹고 있던 때였다.

나에게 백 만원이 생기면 저런 퍼블릭 카 타고 다니며 멋지게 살아야지 했었다.

재수도 아닌 한 해를 보내면서 많은 일 들을 겪고 내 젊은 시절을 이렇게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 퍼블릭 카가 있으면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될 것 같았던 시절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은행 융자를 받아 조금씩 조금씩 집을 늘리던 때,

융자금 다 갚고 돈 백 만원 갖는 것이 그 때 내 소원이었다.

남에게 빌려주어 매달 이자로 3만원씩 받으면 그 돈으로 조금 보태어 또 계를 부어 다시 백 만원을 타고

이백 만원의 이자를 받으면 계돈은 저절로 해결되고...

이백 원하던 파 한 단을 사서 일주일에 나누어 쓰던 시절이었다.

 

그래 나에게 백 만원은 꿈이었고 목표였었다.

그 때는 한 번의 백 만원을 원했었는데 이제 매일 백 만원씩 생긴다면 무얼 할까?

"동서 난 그 백 만원 안 받겠다고 할거야 부담스러워서"

"아유, 형님은 참 행복하신 가 봐요, 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한 번의 백 만원을 위해서 내 인생을 다 보낸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게 정말 내 것이 되겠어?

 

 

 

 

      돈아!!! 돈아!!

 

                  글쓴이: 황완영  조회수 : 39   02.09.02 10:18

 

 

 

       큰부자에겐 껌 값에 불과 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큰돈이죠.

       음!!!

       뭐랄까....

       나이를 먹으면서 차차 욕심이 없어지더라구요.

 

       언젠가 잘 아시는 분께서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떤 사람이 돈이 많았는데, 한 동안 눈에 띄질 않아, 알아보았더니 말기 암에 걸려 세상을 떳더랍니다.

       그 사람은 돈에 철천지 원수를 지어 돈을 쓰지도 못했답니다

       그러면서 "누으면 그만이야,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하시더라구요.

       돈이 없으면 불편하겠지만, 세상만사가 모두 돈으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할까...

 

       대학 다닐 때, 철학과 교수가 시험문제로 "행복이란?" 했던 것이 기억 나는 군요.

       대충 몇 자 긁어 썼던 기억이 납니다.

       행복이 금전적인 것만은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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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新 명절쇠기

 

                      글쓴이: 최영해    조회수 : 63   02.09.20 13:46

 

 

 

다들 고향을 간다 큰집을 간다, 아니면 친척들이 와서 명절준비에 바쁘고 수선스럽고 조금은 짜증도 날테지만

하여튼 사람 사는 냄새풍기고 있을 때 난 오히려 사람냄새 맡기 힘들어진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던 둘째 아들까지 타지에 있다 보니 옆지기 혼자서 지내는 썰렁한 차례지내기가 된지 벌써 두어 해는 되었다.

 

명절 바로 전날 남들 다~ 서울 떠나서 서울이 텅텅빌 때 후르르르 장보고 혼자서 콩당콩당 차례준비는 하지만 나만 힘들지,

하고 나면 누가 먹어줄 사람 있어야지 신도 나지.

차례상에 올리려니 기본은 해야하는 데 그게 어디 곡 한 접시만 만들게 되남?

매번 남아서 며칠 냉장고차지 하다가 버려져 나갈 음식들...

쯧 차례음식 남아서 버리게 되면 조상님께 송구스런 마음까지 들구.

 

이번엔 그래서 방법을 바꿔 보려구.

정말로 아주 쬐금만 꼭 할 것만 하고 웬만한 것은 필요한 만큼만 사서 해결 하려구.

몸도 안 좋구하니 핑계 김에 이번엔 좀처럼 내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던 방법을 시도해 보려구.

하긴 따져보면 보다 더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면도 있는 것 같아서.

 

직장생활 오래한 여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나 또한 장만 봐다 놓으면 거나한 상차리는 것도 삽시간이지.

요즘에야 몸이 굼떠져서 좀 느려졌다고는 하지만 순서를 미리 생각해 놓으면 음식 만드는 것도 쉽지.

 

여지껏 처녀적에 친정에서 5대조까지 꼬박 챙긴 제사 덕에 어느 달 하루 제사 없는 달이 없었던 집안에서 큰 내가,

그땐 부질없이? 일 만들어 하는 부모님을 비판하였었는데 결혼 후 나 또한 그렇게 되어

시부모님보다 한술 더 뜬 내 차례형식에 스스로 만족을 하곤 했는데,,, 이젠 좀 바꿔봐야지.

 

시대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어 감에 따라 부득히 바뀌어져야 할 것은 바뀌어지는 것도 좋을것 같다.

무조건 전통만 고집하고 전통법도만 따르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은 신사복 입고도 부득이 갓은 꼭 써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알맞는 그리고 보다 형식적이지 않고 충분히 조상과 우리와의 관계를 음미해보며

삶을 보다 윤택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새로운 전통을 잡아나가는 것 또한 우리가 할일 아닐까.

 

 

사는 것이 좀 나아지니깐 제기다 뭐다 오래 전에 다 없애버린 것들이 다시 명절 때면 상품판매대에 오른다.

옛날엔 광에 광주리 마다마다에 목제기들과 놋쇠그릇들이 쌓여있었지.

제사 때면 으례 이 삼일 전부터 놋그릇 윤나게 닦는 것부터 차례나 제사의 준비는 시작되었구,,,

이젠 놋그릇대신 닦지 않아도 되는 질좋은 그릇들이 나왔지만 일년에 서너번 쓰는 그런 것은 종중에서나 쓰면 모를까

각 가정에서까지 그렇게 하는 것은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

 

온 나라가 가족과 조상의 참다운 의미를 새기는 것보다는 형식을 따르려고 고생과 법석을 떨고,

명절의 참의미보다는 상술이 판치고, 뇌물을 줄 수있고 받을 수 있는 호기가 되고,

일부에서는 다만 그저 놀러가는 공휴일로서의 의미로서만 다가가는 명절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에구,,, 어디 갈 데도 없고 그렇다고 가족들이 모이는 것도 아닌 썰렁한 추석 쇠려니 내가 심사가 뒤틀려서 이러나?

빨리 나가버려야지 카페에 앉아서 내가 뭣 하는 거지? 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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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을 보내면서...

 

                         글쓴이: 이종규    조회수 : 70  02.12.13 09:16

 

 

 

50평생 처음으로 큰 변화를 맞으며 지낸 한 해였던 것 같구려...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모두모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희망의 신년에도 모두모두들에게 건강과 행복이 긷들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우연히 읽었던 글귀가 생각이 나서 한번 옮겨봅니다

 

" 오래 오래 사시구려!

나이가 들어 늙으면...

잘난체하지 말고, 미움받는 소리, 아쉬운 소리, 헐뜯는 말, 군소리 말고

남의 하는 일은 칭찬만 하시구려.

묻거든 가르쳐는 주되 아는 것도 모른척하고 언제나 바보같이 사시구려..

 

이기려고 기를 쓰지말고, 그저 져 주시구려...

어차피 신세질 몸이기에 젊은이 들에게 자랑을 안겨주고,

한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이 원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 하여도 죽으면 한푼도 못가져간다오.

그 삶은 참으로 좋은 삶이었다고, 사람들이 칭찬하도록

살아있는 동안에 고루 베풀어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그렇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하는 말...

사실은 돈을 놓치지 말고 죽는 날까지 꼭 잡고 계시구려

남들이 구두쇠라 흉을 보아도 돈이 있으니까

소중히 하고, 모두가 아양떨며 비위를 맞춘다오...

 

우리끼리 말이지만 사실이라오

지나간 일들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제 자랑은 하지도 마소

우리들의 시대는 이미 지났으니 아무리 버티고 몸부림 쳐도

이미 몸이 뜻대로 되지를 않소

"당신은 훌륭하나 나는 틀렸소"

그러한 마음으로 지내시구려...

 

나의 자녀 손자와 세상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공경을 받는 좋은 노인이 되시구려...

망령에 걸리지 않게하기 위하여 두뇌도 세탁하여 멋지게 살며

무엇이든 한가지 취미를 가지고 부디 오래오래 사시구려...

 

 

다사다난 했던 2002년을 대전에서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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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글쓴이: 박정숙  조회수 : 77    02.12.13 18:14

 

 

 

몇 명인지 모르나, 하여튼 열 댓명 오르는 남한산성 길은 눈이 덮였고, 나무들은 높았고, 낙엽이 매달려 있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호젓 그 자체였다.

어쩌다가 등산하는 사람을 마주칠 뿐 산은 온통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사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마음에 든다.

히히. 여인네들 웃음소리가 산등성을 타고 골짜기로 퍼진다.

 

오늘은 적당한 코스였던 것 같은데 몇몇 친구는 다음에는 두 번째 산 정산까지 가자고 제의한다.

그것도 좋을 성 싶다.

내 실력이 그 만큼 늘은 징조일까?

 

푸짐하게 밥을 먹고 웬 노래방 건물독채를 차지하고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성희! 내가 외치지 않았더냐? 너를 친구로 둔 것이 자랑스럽다고.

얌전이와 범생이를 합쳐놓은 네가 초반부터 그럴 줄 차마 몰랐다. 좋았어, 참 좋았어.

 

순진아, 이름 좀 갈아라. 도무지 헷갈린다.

폭발하는 열정이여! 게다가 친구들 춤 선생까지 겸하느라 바쁜 모습이여!

정열의 여인. 보기에 즐거웠어.

 

은식이, 사통팔달의 여인. 진지한 노래모습.

이것 저것 챙기며 춤추는 모습이 발랄했어.

나이 들어가면서 네가 좋아지는군!

 

혜신, '님은 먼 곳에'를 부르며 리듬을 타니 내가 놀래버렸어.

덩달아 나도 리듬을 타버렸지 뭐야. 그래서 그 순간이 참 좋았어. 정말.

 

해자,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종횡무진 날렵하게 춤추었어. 실력이 많이 늘었던데.

여자가 40대가 되면 공부 잘하던 여자나 못하던 여자나 그게 그거가 된다하니까 나를 쳐다보며 네가 제일 좋아했지?

그거 보라고. 짜~식. 그게 아니야.

40대에 평준화되었는데 내가 50대에 박사가 되었으니 내가 평준화 프라스 알파가 된거지.

 

으하하하.

 

최영해, 순진이 따라 엉덩이 흔드는 모습이 배꼽 나오게 하더군.

사실 그래서 좋았어.

다들 춤 선생이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할당공간이 다 찼군. 더 이상 쓸 수가 없구만요.

나머지 친구들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하여튼 어제 나는 단언했다,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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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산행

 

                      글쓴이: 김형규    조회수 : 72   02.12.23 14:04 

 

동기들 안녕?

그 동안 소식 없어서 미안해.

혹 욕한 사람은 없었는지 몰라.

살다보니까 , 사는 게 바뻐서, 우선순위 높은 일들이 치받고 올라오니 참 어쩔 수 없더라구.

여기 생활이 다 그래. 여기 살다 간 친구들은 이해가 좀더 잘될까 모르지.

아무리 그래도 뭐 유세 하는 것도 아니고 동기 싸이트에 얼굴 비친지가 3개월이면 공백기간이 좀 너무 길었지?

게을럿던 것도 사실이니 다시 한번 미안하고.. . 오늘은 여기 소식 좀 전할까 해

 

 

며칠 전이었어 집에 돌아오니 answering machine에 메세지가 남겨 있더라구.

“형규야, 나 건영인데 전화 좀 부탁한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면서 걸었더니

내년에 동기들 머슴 일을 맡아서 고생하게 됐다면서 올해 가기 전에 여럿이 모여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것이였어”

 

“이번 토요일 (21일) 산행 겸 모이니까 나와, 10시 반이야 “

 

“이것 참, 나도 그날 우리 Hiking Club 산행인데… 어쩐다? 아! 일찍 끝내고 그쪽으로 냅다 밟으면 시간이 될찌 몰라.

내 늦더라도 갈테니 그러면 조금 기다려 주라”

 

그래서 그날은 소위 말하는 2탕을 뛰게 된 거지.

 

그 전날은 비가 왔어. 아래는 따뜻해도 내가 가는 산은 고도가 높다보니 눈이 하얗게 덥히지..

 

일년 중 해가 제일 짧은 동지라서 어두웠지만 동트기 전 6시에 산으로 향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어 ,

 Chain 도 없이 올라가는데 산밑의 주차장까지 제발 길 사정이 좋았으면 좋겠다,

산에 가면 근사 할꺼야, 오늘은 흰 옷 입은 나무들 사진도 좀 찍어가지고 와야지.

 

아직도 손에 안 익어 잘 쓸 줄도 모르는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오랫만에 눈을 밟아볼 어린애 같은 욕심을 가지고,

다행이 큰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어.

 

역시, 너무도 잘 어울리는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눈은 산을 감싸 않고 서 있었고,

새벽 산행길의 우리는 훼방자의 미안한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눈을 밟았어.

발목까지 빠지면 어때, 눈 덮힌 나무와 산, 이런 연인들의 사랑의 광경을 자주 볼수 있겠어?

참으로 너무도 잘 어우러지는 자연 속에서 나는 아주 작아지고 움추려드는 기분이 들더라구.

 

참, 그게 그래. 사람의 얼굴은 싫증도 나고, 내가 보는 내 얼굴도 나이들면 참 안타까워 지는데

자연의 얼굴은 이리 살도록 보아도 싫증이 안 나고 저리 보아도 입이 다물어 지지 않게 좋은 것은,

우리가 결국은 돌아갈 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지.

창조주의 위대함도 느끼고 연인들의 사랑의 모습도 훔쳐보면서 한 시간 여 올랐다가는 내려 왔어.

이제는 동기들 만나러 갈 시간이네.

 

거기까지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까?,

하기야 토요일 아침이고 교통 체증현상 없을 테니까 서둘러 밟으면 될 것 같기는 한데….

 

만나보니, 생각보다 다들 젊고 활기찬 모습들이더라구.

박영훈, 이건영, 이영재, 박혜순, 유성무등 예의 안 찾아도 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확실히 부담이 덜 되는 일이기도 하더라니까.

몇 명 더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데, 내년에 건영이가 이곳 동기회장으로 수고하면 이루어 질 수 있을 거고

또 그러기를 바래면서 산행길 시작했어.

우선은 산 밑의 적당한 장소까지 차로 가고나서 거기서부터 걷기를 시작했어.

 

영재는 아주 장비를 단단히 준비 해 가지고 왔고 성무도 산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꾼이더라고.

성무는 지난밤의 회식 때문에 몸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우리는 한 1시간 정도 산행을 했고,

오늘의 궁극적인 목적은 화기애애하게 먹고 노는데 있다고 판단한 우리는 음식상을 준비했어.

역시 산에서는 남자들이 음식을 해도 먹을만 하더구만.

집에서 어깨 넘어로 보던 실력인지, 직접 하던 실력인지 잘 모르겠지만 실력들이 슬슬 나오는데 꽤 한 가닥씩들 하더라니까.

아무튼 새로운 기분을 만끽하고 내려왔어.

 

내려와서는 맥도날드 집에서 커피 한잔씩들 하면서 이제 점점 나이 들어가니까 더 들기 전에 자주 만나서 얼굴도 보자,

앞으로 적어도 2달에 한번은 정기적으로 회합을 갖자고 의견들을 모으고는

한 시간 정도 애기 하다가 어둑어둑해지는 Freeway길을 달려 돌아들 갔어.

 

박혜순 동기는 참 그 동안 여러모로 LA의 동기회 활성화를 위해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내년에는 고생한 보람이 있게 될지…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튼 21회 동기 동짓날 산행 만세다!

이런 기회를 핑계 삼아 여기 있는 친구들 사진을 같이 올려.

산행 사진을 보고 싶으신 분들 이 곳에 가서 보시기를…

 

오늘은 이만 줄여.

아참 !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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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글쓴이: 권오현     조회수 : 67  03.01.06 22:12

 

 

 

어제 첫 번째 아버지 제사일이었습니다.

벌써 아버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었어요

 

마침 일요일이라 35평 아파트에 30여 명이 모이니

그 추운 날씨에도 모인 사람의 열기로 온통 방 전체가 더워서 문을 활짝 열어 놓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니 왠 제삿날에 잔칫집 같이 웃고, 노래하고, 게다가 춤까지 추니 ‘너무 지나치다’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친척과의 만남이 있고, 또 그들과의 대화가 있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이게 사람 사는 거다'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각자 생활에 괴로움이 있을지 몰라도 이 때만은 만남의 즐거움에 빠져 마냥 재미있었습니다.

 

자정이 다 되어 제사를 끝내고 일부는 남아 그곳에서 유하기로 하고 일부는 귀가하였습니다

나는 귀가 조에 들어 추운 날씨에 꽁꽁 얼은 차를 이끌고 되돌아 오면서

아버지의 삶을 다시 한번 회고해 보았습니다.

 

생애 공식적으로 10남매를 두셨고 막대둥이가 46세입니다

생전에는 돈도 많이 버셨고 많은 돈을 쓰셨습니다.

활달한 성격에 노래, 춤을 즐겨 하셨고, 다양한 유모어 감각을 지녔으며 승마, 골프, 마작 하다못해 고스톱까지

각종 오락을 섭렵하며 어머니 속을 많이 썩혔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절대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어요.

그땐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그런 어머니가 어제 제사 때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난 절대 네 아버지가 그리워서 우는데 아니다” 하면서

하염없이 우시는 걸 보니 모두가 잠시 미묘한 감정에 빠지기도 했었지요.

 

우리 형제 중에 가장 아버지의 藝妓를 닮은 사람은 딸이 그것을 이어 받았어요

나는 아버지를 닮은 점이 있다면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반대인 점은 아버지와는 달리 활달하지 못한 점이 있지요

 

하여튼 아버지는 하늘이 한번 내리신 삶을 정말 남자답게 미련없이 풍요롭게 즐겁게 사시다 가셨습니다.

 

1966년 서울사대부고 입학시험 시 -그때도 몹시 추웠던 걸로 기억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입학시험시간 내내 을지로 시장을 거닐며 합격을 기원하시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 아들에게 ‘수고 했다’ 하면서 몸에 품었던 따뜻한 호떡을 내밀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 생각 납니다.

 

돌아가셔서 많은 자손들이 모여 비록 제삿날이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마련 하셨고

생전에 그 많은 원망을 하셨던 어머니도 애증의 눈물을 보이시는 걸 보니.....

아버지의 삶은 화려하지는 못했어도 '사랑이 있는 멋있는 삶' 이셨습니다.

 

 

 

  • profile
    김해진 2022.05.09 11:11

    이번 글은 좀 길었죠?
    사진은 07년 11월 안나푸르나를 간 친구들이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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