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내린다
세상은 온통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캄캄한 먹빛이다
언젠가 비오는 날엔 뜨끈한 부침개를 먹으며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는 것이 제일이라는 글을 쓴적이 있지만
요즘처럼 불면에 뒤채는 날에는 차라리 밖에 나가 빗방울에라도 따갑게 얻어 맞고 싶다
길을 나섰다
며칠 퍼부운 장맛비로 강물이 온통 진흙빛이고 여기저기 비탈들이 무너져 내려 새빨갛게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를 바라보는 일은 가슴 아프다
일년내 가꾼 논밭을 잃은 농부의 마음은 얼마나 더 아프랴
모질게 흔들리다 끝내 길위에 쓰러진 이름없는 들꽃들, 그리고
옥수수대들이 들판에 쇠잔한 생을 누이고 있다
하지만 이 비 그치고 며칠 여름 햇살을 받고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새롭게 삶을 이어 가겠지
길을 떠나는 일은 낯선 바깥과 열린 마음으로 사귀는 일이라 했던가
그것은 바깥을 향한 나들이가 아니라 나의 내부를 향한 발걸음이라는 것을
길을 떠날 때마다 길위에서 깨닫고는 한다
사진/ 경안천(퇴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