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는 아직도]
젖은 바람이 한 차례 스치고 지나갔다. 몇 안 되는 새벽 손님이 뿔뿔이
흩어지고 난 썰렁한 역사, 하루 세 번 밖에 기차를 세우지 못하는
플랫홈은 면목 없고 초라한 모습을 감추고 싶었는지 부지런히 안개를
불러 모으고, 사는 것이 다 그러하듯이 기우뚱 목을 내밀고 바라보던
신호등이 잠시 번득이나 싶더니 이내 안개 속에 붉은 물감을 털어놓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철길 따라 줄지어 늘어섰던 깡마른 옥수숫대가 지워지며 참을 수없는
아쉬움의 눈빛으로 돌아보고 돌아보고는 했다. 숨겨야 할 모습의 숨김
이나 숨길 것 없는 초라한 숨겨짐이나 안개는 혼신의 힘으로 형태를
지우는데 열중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하얗게 지워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詩/사진/김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