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그친 뒤 혼자서 걷는 산길에 연한 송진 냄새가 납니다
멀리서 바라본 산은 진초록 윤곽을 지우며 엷은 회색으로 번져 오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안개 때문인지 비 때문인지 알 길이 없지만 숲은 어느새 어두운 그늘이
벗어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어 무섬증이 들만큼 숲길은 고요합니다.
흐릿하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풍경화를 그리던 “윌리엄터너”라는 화가가 있는데
오늘은 문득 그의 그림 속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후드득거리며 비가 옵니다.
참나무 움푹 패인 틈새로 빗방울이 고였다가 떨어지면서 나무속에 응결되었던
오래된 시간들이 빗방울 타고 내려오다가 바닥에 산산이 풀어헤쳐 집니다.
기억이란 켜켜이 쌓여있는 저 참나무 나이테 같은 것, 머릿속에 있는 추억을 형상화
시킬 수만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보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풍경은 눈밖에 펼쳐지는 바깥세상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결정되어 우리 눈으로 전달
되어지는 이미지란 생각 때문입니다
설렘이 사라져버린 사진 속의 풍경은 이미 죽은 풍경입니다
기억나면 기억나는 대로 잊어지면 잊어지는 대로 사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고갯마루에 싸리 꽃이 피었습니다.
엷은 보라색 꽃술 위에 올망졸망 맺혀있는 저 애잔한 자줏빛 싸리 꽃,
젖빛 유리를 통해 바라보이는 안개 속 풍경 같은, 군더더기를 떨어버린 파스텔톤의
색깔을 좋아합니다.
예술 행위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 이외의 주변 것들을 조금씩 지워 가는 과정이란 말도
있지만 예술에서나 삶에서나 혹은 사랑에서나 덜어내고 지워 간다는 것은 번뇌와
아픔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바위 틈서리에 피어나 비를 맞고 서있는 노랑 양지꽃이 유난히 눈에 띕니다.
가장 밝은 빛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어떤 빛깔도 우리 눈에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지는 것은 없습니다.
다른 빛이나 그림자에 의해서 조금씩 굴절되고 왜곡되어지는 것입니다
빛이 있기 때문에 사물이 존재한다든가 빛에 의해 아침이 생기고 밤이 되고 시간이
만들어지고, 있고 없음, 아름다움과 추함이 오직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시각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은 때로 詩처럼 고독하게 숨어있기도 합니다.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하찮은 곳에서 아름다움의 두께를 찾아보는 일, 숲 속 에는
설레임이 있고 시가 있고 추억이 있습니다.
글/김용민
이런 현상을 일컬어...<운수 좋은날>
비그친뒤의 숲길...웬지, 막막하기도 하고 웬지, 설레이기도 하는.
글을 읽으며...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