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나봅니다 하늘이 무겁게 내려오고 먼데서 산봉우리가 구름에 지워지고 있습니다.
침침한 빛, 흐릿해지는 사물들, 묵직하게 흩어지는 자동차 소음, 세상의 조도가 낮아지면
눈부시고 화려한 것 그림자에 가려져 평소에보이지 않던 작고 소소한 것들이 모습을 드러
냅니다. 새 한 마리 포물선을 그으며 낮게 날아갑니다. 새를 쫓아가던 내 마음도 덩달아
낮게 가라앉습니다.
무겁게 흐린 하늘을 무슨 색이라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가벼운 느낌의 회색빛 보다는
잿빛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사물이 태양빛을 걸러 몸 안에 들이거나 내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색이라면 색이 무겁다는 것은 모든 빛을 받아들였다는 의미가 되지요.
일테면 빛의 앙금이라고나 할까요.
흘러가는 것과 변하는 것은 본시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사물의 색깔도 생성, 성장,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고 봅니다. 새싹이 땅을 뚫고 나올 때는 하얀색이었다가 차츰 연두색이 되고
초록이 되고 갈색이 되었다가 잿빛이 됩니다. 끝내 색이 다 빠져나가면서 땅으로 돌아갑니다.
생명의 마지막 색깔까지 모두 내어 놓고 자연이 됩니다.
색이 모두 빠져나갔다고 해서 색깔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무채색이란 인간이
글로나 그림으로 표현 할 수 없는 마지막 색깔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먹물에 물을 듬뿍 묻혀
하얀 화선지에 발랐을 때 종이 안에서 없는 듯 있는 듯 배어나오는 느낌의 색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새로운 느낌이 되는 커다란 달 항아리 백자 같은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사람의 몸 안에서도 색이 만들어진다고 믿습니다. 삶의 풍파를 마음 안에 들이고 삭히면서
살아가다보면 만들어지는 잿빛 같은 색, 늙음의 색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지요. 찌꺼기는
남겨두고 향기만 걸러내는 찻잔의 찻잎처럼 훗날 내 몸도 그렇게 맑게 우려내어 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진 글 / 돌배 김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