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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대부고 21회 동기회 Life · Dream ·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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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지던 날

윤기정

 

“날씨 좀 풀리는 내년 봄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세. 반갑네.” 선생님이 일러준 번호로 나눈 짧은 통화다. “윤기정 군. 참 오래도 되었네. 그래도 윤 군이 기억해 주니 고맙네. 내 글짓기 시간이 윤 군에게 '강렬한 사건'이 되었다니 부끄러우면서도 교사 노릇 한 보람을 느끼네. 2017년 등단했다고 했는데 어느 잡지, 누구의 추천인가? 내 전화는 010-XXXX XXXX일세. 윤 군 전화번호도 알려 주게. 이만 줄이네. 안녕히. 부고의 옛 교사 정진권.” 선생님이 인사드린 메일에 정감 넘치는 답을 주셨다. ‘이만 줄이네. 안녕히.’가 새삼 명치에 걸린다.

53년 전,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였다. 선생님이 우리 반 국어과 지도를 맡았다. 대학 입시가 엄혹한 시절에 그분은 주당 1시간의 수업을 글짓기지도에 할애했다. ‘아침의 미소’, 등굣길에서 자주 보는 여학생에 대한 글의 제목이었다. 잘된 제목으로 뽑혔다. 다음으로 파월기술자였던 아버지 얘기를 썼다. 희생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라 부자간의 애증에 대한 글이었다. 다음 시간 우수작 발표할 때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등교할 수 없었다. 우수작에 든 글은 칭찬과 함께 누군가가 대신 읽었다는 얘기를 친구에게서 들었다. 강렬한 사건이었다.

찾아뵙겠다던 그 내년 봄이 한창일 때 남유럽을 돌고 있었다. 돌아와서는 봄꽃에, 봄나물에, 오디며 보리수 같은 봄 열매에 정신을 팔았다. 봄이 이울 무렵 섬강을 바라보며 제자들이 마련한 칠순 축하연에서 거나하게 취했다. 그러구러 봄이 다 가도록 봄의 약속을 미루고 있었다. 강의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여 강의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찾아 봬야지. 통 크게 문하생들도 함께하자 하여 점심을 사자.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문하생들 앞에서 한껏 어깨 펴도록 해 드리자. 계획만 나날이 구체화하였다.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소개할까? 난 어떻게 선생님을 자랑하고 나름 성공한 그러면서도 공손한 제자처럼 보이게 할까? 이런 문제까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봄이, 화사한 봄이, 해맑은 봄이, 제자들의 걱정 없는 웃음이 번지는 봄이 봄에 할 일을 자꾸 미루게 했다.

문학 단체 연락망을 통해서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다. 뒤늦은 약속을 지키려 서둘러 나섰다. 강의하시는 곳이 아니라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문하생들이 아니라 잘 모르는 문학계의 원로들이 둘러앉은 식탁의 말석에 앉았다. 봄이 다 지나간 7월 초였다. 짧은 메일에서 읽어냈던 선생님의 반가움과 보람과 약속을 기다리는 설렘이 어떠했을지에 회한이 가 닿았다. 제자들에게 대접받으며 훌륭한 스승인 양 폼 잡다가, 일생에 전기를 주신 제 스승에 대한 고마움은 뒷전으로 밀어 두었다가 사은(師恩)의 기회마저 영원히, 깨끗이 잃어버렸다. 봄 때문에 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나 자신에게 우겨대고 우겨댔다. 내 허물을 감추고 변명하는 문상이었다.

정진권 선생님께 하직 인사 올리고 돌아온 집안에는 잔디 위에 능소화 몇 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푸른 잔디와 주황색 능소화의 조화가 선명하다. 모양도 색도 그대로인 채 져서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는 꽃이다. 돌아서는 등 뒤로 ’투욱 툭‘ 능소화 한 송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꽃이 떨어질 때 떨어지듯이 말도 해야 할 때 해야만 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다른 해보다 유달리 일찍 폈던 능소화가 떨어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초여름의 저녁놀과 능소화가 하나같이 붉었다. 한 가지에서 피고 짐이 무상하다.

날마다 잊고 사라지는 게 새로 알고 얻는 것보다 훨씬 많은 나이가 되었다. 그 옛날 학창 시절의 강렬한 사건은 재 안의 불씨였나 보다. 퇴직하면서 그 불씨가 살아났다. 글을 쓰기로 작정했고 2017년 등단 작가가 됐다. 대학 동기가 체육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축하 차 찾아갔을 때 옆 교수실 명패에서 그분 이름을 보고 반갑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출장 중이라서 그날 뵙지는 못했다. 어느 책에서 자장면에 관해서 쓴 그분의 수필을 발견하고 선생님을 뵌 것처럼 반갑던 일도 있었다.

어디선가 수필 강의를 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한국산문》에 선생님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그분과의 인연이 실낱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메일 주소가 나와 있는데도 연락할 생각조차 못 했다. 특별한 게 없었던 학생을 기억하실 리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 희망을 품게 된 것이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그분의 수업에서 싹텄음을 나는 안다. 여든이 넘으셨나 보다. 메일이라도 드려서 사람 노릇 하자고, 해를 넘기기 전에 메일로 인사를 올렸다. 바로 답장을 주셨다. 그리고 먼 길 가셨다. ‘주신 불씨 하나 크게 피워보겠습니다. 선생님.’

《한국산문》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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