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길을 걸으며

by 김용민 posted May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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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을 건너 이제 막 도착한 비가 대지를 적신다

산사를 지나며 듣는 정겨운 빗소리

꽃망울을 희롱하듯 툭툭치는 이 봄비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그래, 희우 (喜雨) !

비를 맞으면 오랜만에 꺼내 입은 묵은 옷 내음처럼

지나간 시간의 갈피가 향기로 다가온다

 

얼굴을 파고드는 빗방울이 그대였으면 싶은 날

벌써 온몸이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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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빠진 호흡을 잠시 내려놓고 바람소리에 취해 본다

밥 냄새처럼 코끝을 간지르는 싸한 흙 내음

꽃 이파리 하나가 기왓장에 아슬아슬 매달려서

배시시 웃는다

작은 꽃 이파리에서 나는 왜 순례의 경건함을 생각하고 있는지

 

상처를 넘는 법, 절망하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법

그 것이 곧 삶을 넘는 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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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기와 뒤에서 한줌 꽃이 불쑥 고개를 든다

저 삐딱한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서성거리는 인간이 수상한지

꽃이 갸우뚱 물음표로 서 있다가 이내 말을 걸어온다

“뭐 찍어요? 나도 한 장 찍어 주세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 이런 스스럼없는 물음에 쉽게 감동 하게 된다

 

소통이란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돌아 볼 때

한순간 가슴이 환해지며 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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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지 않는다

비를 피해 들어간 찻집 유리창 풍경이

세상 끝나는 것처럼 흐릿하고 고요하다

수많은 물방울들이 차츰 저마다의 형체를 잃어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닮아 간다

나의 색깔을 내가 먼저 지우고나면 서로에게 달려가기도

서로가 마주하기도 쉬워질 테지

내가 가벼워진 만큼 상대는 더 무거워질 테니까

그 것이 진정한 삶의 무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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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길을 멈추고 바람이 헝클어 놓고 간 풀 섶을 본다

한 때는 봄이고 꽃이었을 텐데.........

지고 나니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꽃의 망막에 비친 지금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제 몸을 비워내고도 덜어내고도 신전의 기둥처럼 의연한 저 자세

 

견딘 것들, 견딘 것들은 흔적이 남는 법이다

절실하지 않으면 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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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길과 물길이 나란히 이어진 숲속에

소나무가 냇물 위에 자신의 모습을 새기고 있다

삶은 자신을 새기는 일

너와 나 사이, 나와 세상사이, 어제와 내일 사이

지루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여정에

끊임없이 자신을 새겨 넣는 일이다

빗방울 하나가 콧잔등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른다

 

내 속에 있던 잘못한 일, 비겁했던 일, 억울한 일들은 꺼내

가만히 소나무 그림자 곁에 놓고 길을 내려 온다

 

 

돌배나무/ 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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