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혹은 꽃

by 김용민 posted Jan 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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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_3390.jpg

                                                                             경복궁 F5 78mm ISO200

 

      

       눈 혹은 꽃

 

 

 

눈이 온다

묵은 것들 깨끗해지라고 아침부터 온다

하얗게 온다

 

고궁 담 모퉁이 한적한 길을 발자국 만들며 걷는데

눈송이들이 고목나무 가지마다 꽃을 피웠다

그중에 몇몇은 구부정한 어깨를 나무 등걸쯤으로 알았는지

내 어깨위에도 조심스레 피웠다

괜찮다 괜찮다 꽃피는 게 어디 꽃나무뿐이랴

 

밤새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난밤 내 책상 하얀 종이 위에서도

사각사각 꽃피는 소리 들렸다

 

너무 늦게 온 탓일까

개중에 몇몇은 이미 지는 중이어서

길 위에 낭자하다

그래서 눈은 아무리 많이 와도 많이 오는 것이 아니며

밤새 내려도 아쉽다고 했을까

필 듯 말듯 하다가 화르르 무너지고 마는

짝사랑처럼

 

피고지고 피고지고

철마다 마른가지를 맨살로 비집고 올라왔다가

자지러지며 떨어지는 꽃

그러니까 꽃은 필 때도 아프고 질 때도 아프다

아프지 않은 꽃은 종이꽃 뿐

 

그런데 내 몸에 꽃 피었던게 언제였더라.

 

 

돌배나무 /김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