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다
한철을 못 넘기고 지고 말 것을 무슨 생각으로 저리 피었다가 지느냐고 묻지 말자
꽃이 되려는 의지, 꽃을 피우려는 의지만으로도 얼마나 숭고한가
그러고 보니 나를 살게 하는 건 매번 다른 색깔로 물들이고 싶은 사랑이었는지 몰라.
아니 어쩜 이별이었을지도....
그 사랑이 비록 꽃을 피우지 못했더라도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는 것도 사랑이려니
사랑은 부르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고 가야만 하는 것
절망으로 허우적거릴 때 팔을 내밀어 껴안는 것이고 내가 당신의 색깔로 물들고
당신을 위해 내 몸쯤은 망가져도 좋다는 선포다
세상에는 피고 싶어도 피지 못하는 꽃도 있고 피고 싶지 않아도 피어야하는
꽃이 있다지만 이 눈부신 생명의 퇴장 앞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다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가을.
강가에 서면 마음 안쪽에도 강물처럼 수평선이 그어진다
수평 구도가 주는 안도감 때문일까 출렁대던 상념들이 수면 아래로 잠잠히 내려앉는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가만히 눈감고 생각해 보니 아직 내게 남아있는 기억들은 거의가 흔들리고 서성거리던
시간뿐이다
이 낯선 세상에 너무 오래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첫눈이 와도 계절이 바뀌어도 설레임이 없는 삶은 단지 여생일 뿐이라던 말
속살거리는 연이파리 사이로 가을바람이 살랑거린다.
물아래 그림자가 간간히 흔들린다.
연이파리 사이로 틈을 낸 작은 유리창엔 한껏 푸른 하늘이 터를 잡았다
세상 밖으로 성큼 다가서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늙어가는 소심한 것들의
반짝임을 위해서 태양은 오늘도 종일 떠 있는 것이라나.
연밭 가운데 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두 나무
같은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사는 그리움이 하늘로 키만 키웠을까
누군가 그랬지
곁에 있다고 하나 일 수 없듯 떨어져 있다고 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휘어지고 틀어지면서도 애써 균형을 잡아가는 나무의 절제 된 품격에 뭉클해진다.
나무는 진즉 알고 있었을까
절제된 관능만이 상대를 더 깊숙이 끌어당길 수 있다는 이치를
지니고 있던 에너지가 모두 소모될 때까지 혼신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이 땅에 던져진 생명들의 의무가 아닐까
마음에 들지 않아 모양을 바꾸거나 색을 지울 수는 없어도 정성을 다해 제 몸을
가꾸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고귀한 것인지 꽃들을 보고 안다
아직도 사는 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어도...
세미원에서 /돌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