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진다
검붉은 구름이 일렬로 줄지어있는 “짱둥어다리” 위에서 엷게 물들어 가는 수줍은 노을,
눈부시게 붉은 섬광은 아니어도 망막을 적셔내는 살구빛이 아련하다
머무름이나 떠남, 드러남이나 은페에 연연하지 않는 고요의 여백에 호흡이 멎는 것 같다
누군가에 사무쳐 미칠 것 같아 손에 카메라가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저 노을은.
바람에 비에 떠밀리듯 다리를 건너며 웃음소리는 내내 그치지 않았다
노을이 안 보이면 어떤가
아끼던 모자가 바람에 날라 가면 또 좀 어떤가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만나는 친구라는 이름의 작은 행복,
그렇게 우리는 세월의 다리를 건너왔으니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게 없는데도 말이야
짜장면이 좋은지 짬뽕이 좋은지
양말을 신을 때 오른발부터 신는지 왼발부터 신는지
나처럼 커피를 엄청 좋아하는지
책은 무슨 책을 읽는지
버켓리스트에 어디가 가고 싶다고 적혀 있는지
그래도 조금만 더 너에게 다가가 보고 싶어 오늘 같은 날은
몸은 삶을 푸는 열쇠다
단순한 몸놀림 하나에도 수 천 수만의 세포가 움직인다
달려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는 이미 내 몫이 아닌 것 몸을 움직여 마음을 열면
하늘도 만나지고 땅도 만나지고 사람도 만나진다
만나지 못하면 또 어떠랴
세상에는 꽃이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이 꽃을 못 보는 상사화도 있으니
난간에 기대어 비바람이 헝클고 간 풀 섶을 본다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 일이 이처럼 살갑고 뭉클 할 수가 없다
사랑은 보고도 못 본 것이고 품어도 허전한 것이며 살아도 안타까운 것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하는 딱 그만큼의 거리란 얼만 큼일까.
깨끗한 햇살이 지붕에 내려 앉아 곱게 빛난다
보석에 빠지면 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고 했던가
멈추면 보이는 것들 비켜서면 더욱 명료해 지는 것들
이 먹먹한 순간을 나는 얼마나 고대 했던가
조용히 셔터를 누른다
단지 해가 진다는 이유만으로
저 바다가 저리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주 천천히 내가 내게로 돌아와 혼자가 되는 저녁 이 시간
어느새 하늘에는 비구름 사이로 별이 뜨고
아 저 별 !
한 번도 크게 반짝여 본적 없는 이름 없는 나의 별
가로등 불빛 때문에 아침인가 싶어 자다 깨기를 서너 번,
드디어 날이 밝았다
세상이 온통 첫날처럼 눈부시다
어제 밤 그 많던 먹장구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수평선을 넘어온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귓전을 스친다
따뜻하면서 춥고 추우면서 따뜻한 아침
남은 날들도 구름들처럼 부디 쫓기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평화로운 나날들만 있었으면
거친 담벼락에 기와그림자 하나 슬며시 내려 앉았다
지나치게 화려해서 쓸쓸한 세상에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 덤덤하게
몸을 기댄 그림자가 자꾸 걸음을 붙든다
가장 눈부실 때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동백꽃처럼 가장 아름다울 때 스러지는 가을,
그러므로 조금은 아파야 통과 할 수 있는 가을,
그래도 조금만 아프고 조금만 외로웠으면
돌배나무 / 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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