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1954 - )1. 흔들리며 피는 꽃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며 피었나니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2. 담쟁이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우리가 느낄 때 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3. 희망그대 때문에 사는데그대를 떠나라 한다.별이 별에게 속삭이는 소리로내게 오는 그대를꽃이 꽃에 닿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대를언젠가는 떠나야 한다고사람들은 내게 이른다.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돌아섰듯이알맞은 시기에 그대를 떠나라 한다.그대가 있어서소리없는 기쁨이 어둠속 촛불처럼수십개의 눈을 뜨고 손 흔드는데차디찬 겨울 감옥 마룻장 같은 세상에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온한장의 얇은 모포 같은 그대가 있어서아직도 그대에게 쓰는 편지 멈추지 않는데아직도 내가 그대곁을 맴도는 것은세상을 너무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사람사는 동네와 그 두터운 벽을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모든 아궁이가 스스로 불씨를 꺼 버린 방에 앉아재마저 식은 질화로를 끌어안고따뜻한 온돌을 추억하는 일이라 한다매일 만난다 해도 다 못만나는 그대를생에 오직 한번만 만나도 다 만나는 그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