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끌어안으려는 어머니의 집요함을 근절시키려 엉클은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한국근무를 지원한 것이었다. 나를 내쫓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떨어뜨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부드러운 방법이었다. 어머니는 당황했다. 다섯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돈을 더 벌려고 전시수당까지 지급되는 한국에 근무하겠다는 엉클의 말은 타당성이 있었고, 어머니의 고향에서 근무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미군에 자원입대시키려 했지만 엉클은 반대했다. 자기 사인이 없으면 절대로 입대할 수도 없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 자기를 속였다는 어머니에 대한 엉클의 분노는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졌다.
나는 절망의 상처에 또 절망을 계속 얻어맞고 있었다. 사춘기를 갓 넘어선 19살 나이의 가슴은 이미 꺼멓게 변해 버렸다. 상쾌했던 새벽버스는 사막지대를 고단하게 달리는 역마차 같았고 학교 앞의 광장은 텅 빈 외로움이었다. 점점 말수도 적어져 갔으며 직장에서도 피곤한 내색을 보였다. 미찌꼬는 내가 자기의 집에 들어와 살면 참 좋을 것이라고 슬쩍 말을 던졌다. 그것은 내 상황을 알아채고 집에서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눈으로 확인할 것이 있었다.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장래에 내가 무엇이 되든 상관없는 일이다. 나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어머니도 내가 말없이 집을 나가서 넓은 미국땅의 어디에선가 정착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머니와 한바탕 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는 꼭 어머니가 남몰래 끓여둔 찌개나 국이 있었고 따듯한 밥이 전기밥솥에 들어있었다.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듯 마련한 내 식탁에는 애증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혼자 웃고 우는 행동도 반복되다 보면 한 가지 표정으로 통일되었다. 바로 무표정이었다. 맵고 시큼한 맛이 빠진 김치찌개 같았다. 피폐 된 가슴은 이미 칠십을 넘긴 노인처럼 흐늘거렸다. 이제 나의 마지막 임무는 아버지의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하며,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바로 나를 방치하여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할 것인가를 들어보는데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남편의 옹호를 받으며 나에게 손가락질 했는데, 아버지도 과연 그럴 것인가를 똑똑히 보고 싶었다. 나는 거지가 되어도 좋고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도 괜찮다. 엉클이 한국에 지원하여 나를 끌고 나가지 않아도 내발로 먼저 나갔을 것이었다. 벌어놓은 돈도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표는 충분히 사고도 남았다.
마음만 먹으면 은행에 넣어둔 돈을 몽땅 찾아서 멀리 떠날 수도 있었고 마약이나 대마초에 묻혀서 지낼 수도 있었다. 브로드웨이의 창녀도 살 수 있고 오토바이를 타고 흑인들과 몰려다니며 대륙의 방랑자가 될 수도 있었다. 잘하는 영어는 아니지만 눈치로 때려잡으면 대충은 의사소통도 되었다. 그러나 나는 타락 이상의 타락을 택했다. 내 얼굴과 국화빵처럼 닮았다는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원하는 것은 없었다. 더구나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을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나를 찾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반가워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노스웨스트기에 몸을 실은 어머니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들은 일해서 모았던 돈을 확인하고는 내 보금자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모두가 Good-bye였다. 눈치 볼 일도 없고 밤마다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집안에 들어설 일도 없다. 다섯 형제들의 극성스런 눈초리에 밀릴 일도 없다. 굶어죽든 통을 짊어지고 구두닦이로 나서건 나에게는 자유가 확보되며 나뭇가지에서 태어난 자로서의 삶이 있을 뿐이다.
1년 후,
서울 명동의 유네스코빌딩 지하다방에 사십을 갓 넘긴 남자가 금딱지 로렉스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수출회사의 중역인 그는 오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낮선 목소리의 청년이었다. 회사로 찾아오겠다는 그를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초조한 표정의 중년남자 앞으로 20대 청년이 다가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얀 와이셔츠에 화려한 넥타이를 맨 남자는 손짓으로 앞좌석을 가리켰다. 청년은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그 동안에 욕봤지?”
청년은 한참 침묵하다가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방종업원이 커피잔을 테이블에 놓는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흔들었다. 중년남자는 서서히 말을 시작했고 청년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지난 이야기는 하지 말기로 하자. 숙명이라고 생각하자. 나도 먹고살기 바빠서 눈 돌릴 틈이 없었다. 우선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지.”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가 셋이다. 딸 둘에 아들 하나인데, 아직 어리고......”
청년은 냉소를 흘렸다. 이미 예상된 말이기에 섭섭할 것은 없었다. 그냥 확인사살을 해 본 것에 불과하다. 다방 안에는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잔이라는 노래가 퍼지고 있었다. 그냥 커피나 한잔 마시고 일어서면 되는 것이다. 청년은 더 이상의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질질 짜는 순정파도 아니었다.
*****
에필로그
지금까지 애독하여 주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글이 실화냐는 질문을 쪽지로도 받았습니다. 글을 시작할 때에 밝힌 것처럼 지금까지 올려진 글은 모두가 본인의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세상에는 똑같은 형태는 아니라도 저와 같은 경험을 가진 분들도 무척 많습니다. 지금도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계속 양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를 찾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3년간 체류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살고 있는 친척이 귀국하여 조심스럽게 근황을 전했습니다. 미군하고 벌써 이혼했으며 아이들은 모두가 출가했다고 합니다. 다만 막내아들이 마약을 복용하여 무척 고생했다고 하며 독실하게 기독교신앙생활을 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친척도 어머니와 나와의 애증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화도중에 가슴을 치는 한 가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 이야기만 나오면 말이야, 네 엄마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고 말도 횡설수설 하더라.”
실로 통곡입니다. 어머니는 영원한 어머니입니다. 열 손가락 가운데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습니다. 미군 결혼하여 세계를 유랑민처럼 떠돌아 다녔고, 다섯 아이를 키웠습니다. 저의 어머니라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현명했고 강했습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모정으로 저와 다섯 아이를 모두 감싸 안았고 외로운 이국생활에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홀로 섰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횡설수설하는 말투와 상기된 표정으로 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오십이 넘은 저를 말입니다.
며칠 동안 핸드폰도 꺼놓은 채 두문불출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구상할 필요도 없고 글을 쓰기 위하여 현지를 답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사춘기의 경험이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발자취입니다. 봇물 터지듯 아무런 각본도 없이 그냥 자판을 두드렸습니다. 많이 울면서 썼습니다. 삼십 여 년을 가슴에 묻어온 이야기를 쓰기 위하여 삼년간의 긴 세월을 꾸준히 글만 썼습니다. 비로소 제 가슴을 다 받아 줄 필력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곧바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먼저 썼습니다. 이곳에 올린 글은 어머니 가슴의 천분의 일도, 만분의 일도 안 됩니다. 필설(筆舌)로는 다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전 상서
이제부터 어머니는 웃으셔도 됩니다. 철없는 제 가슴에 애(愛)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증(憎)은 없습니다. 오직 어머니를 사모하며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하며 미움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만약에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크게 웃으십시오. 그리고 말씀하세요. “너도 참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러면 저는 또 울음을 터뜨릴 것입니다. 정말 힘든 삶을 살았다고 일부러 투정부리며 어머니의 품을 찾아들겠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단순한 어머니가 아닙니다. 바로 저의 영원한 연인이기도 합니다. 단아한 모습에 빨간 줄무늬의 정장차림, 샌프란시스코의 파란하늘과 쌀쌀한 목소리에 들어있던 포근함, 멀리서도 따듯한 가슴을 던지는 마술,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아름답고 신기할 따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무조건 세계에서 제일가는 미인입니다.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품격이 있습니다. 딱 한 명의 여인이 어머니에 버금가는 미인입니다. 바로 제 딸입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당신의 손녀랍니다.
저는 이 글을 제 자식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얼마나 할머니가 자랑스러운 분인지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똑똑한 할머니, 강한 할머니, 자존심 강했던 할머니, 그 모든 것이 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할머니입니다. 먼 훗날, 저 별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 때는 어머니를 놓지 않고 꽉 붙들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기쁨과 웃음을 가져다주는 아들로 남을 것입니다. 저는 후생을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저 세상에서는 이루어진다고 하더군요. 그 때에 어머니를 뵙겠습니다. 저는 글쟁이입니다. 남들은 저를 수필작가라고 말하더군요. 돈을 많이 버느냐고 묻지는 말아 주세요.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쓸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드리는 시를 하나 올리겠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잠을 깬 새벽하늘로,
눈물바람이 반짝이며 날아오릅니다.
서러움의 눈물이라면,
그리움의 눈물이라면,
바로 당신이 닦아 주어야 할 눈물입니다.
먼 동쪽 하늘에서 솟는 바람이 있다면,
바로 눈물바람입니다.
안타까운 눈물이라면,
가슴 아린 눈물이라면,
제가 닦아 주어야 할 당신의 눈물입니다.
동쪽으로 달리던 눈물바람이,
서쪽으로 달리던 눈물바람이,
태평양에서 서로 만나면,
당신은 왼쪽 날개입니다.
저는 오른쪽 날개입니다.
찬란한 빛을 발하는 나비 한 마리,
파란 하늘 아래
파란 바다 위에
팔랑팔랑 날갯짓
눈물바람이 반짝반짝 날아갑니다.
나는 절망의 상처에 또 절망을 계속 얻어맞고 있었다. 사춘기를 갓 넘어선 19살 나이의 가슴은 이미 꺼멓게 변해 버렸다. 상쾌했던 새벽버스는 사막지대를 고단하게 달리는 역마차 같았고 학교 앞의 광장은 텅 빈 외로움이었다. 점점 말수도 적어져 갔으며 직장에서도 피곤한 내색을 보였다. 미찌꼬는 내가 자기의 집에 들어와 살면 참 좋을 것이라고 슬쩍 말을 던졌다. 그것은 내 상황을 알아채고 집에서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눈으로 확인할 것이 있었다.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장래에 내가 무엇이 되든 상관없는 일이다. 나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어머니도 내가 말없이 집을 나가서 넓은 미국땅의 어디에선가 정착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머니와 한바탕 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는 꼭 어머니가 남몰래 끓여둔 찌개나 국이 있었고 따듯한 밥이 전기밥솥에 들어있었다.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듯 마련한 내 식탁에는 애증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혼자 웃고 우는 행동도 반복되다 보면 한 가지 표정으로 통일되었다. 바로 무표정이었다. 맵고 시큼한 맛이 빠진 김치찌개 같았다. 피폐 된 가슴은 이미 칠십을 넘긴 노인처럼 흐늘거렸다. 이제 나의 마지막 임무는 아버지의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하며,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바로 나를 방치하여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할 것인가를 들어보는데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남편의 옹호를 받으며 나에게 손가락질 했는데, 아버지도 과연 그럴 것인가를 똑똑히 보고 싶었다. 나는 거지가 되어도 좋고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도 괜찮다. 엉클이 한국에 지원하여 나를 끌고 나가지 않아도 내발로 먼저 나갔을 것이었다. 벌어놓은 돈도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표는 충분히 사고도 남았다.
마음만 먹으면 은행에 넣어둔 돈을 몽땅 찾아서 멀리 떠날 수도 있었고 마약이나 대마초에 묻혀서 지낼 수도 있었다. 브로드웨이의 창녀도 살 수 있고 오토바이를 타고 흑인들과 몰려다니며 대륙의 방랑자가 될 수도 있었다. 잘하는 영어는 아니지만 눈치로 때려잡으면 대충은 의사소통도 되었다. 그러나 나는 타락 이상의 타락을 택했다. 내 얼굴과 국화빵처럼 닮았다는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원하는 것은 없었다. 더구나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을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나를 찾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반가워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노스웨스트기에 몸을 실은 어머니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들은 일해서 모았던 돈을 확인하고는 내 보금자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모두가 Good-bye였다. 눈치 볼 일도 없고 밤마다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집안에 들어설 일도 없다. 다섯 형제들의 극성스런 눈초리에 밀릴 일도 없다. 굶어죽든 통을 짊어지고 구두닦이로 나서건 나에게는 자유가 확보되며 나뭇가지에서 태어난 자로서의 삶이 있을 뿐이다.
1년 후,
서울 명동의 유네스코빌딩 지하다방에 사십을 갓 넘긴 남자가 금딱지 로렉스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수출회사의 중역인 그는 오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낮선 목소리의 청년이었다. 회사로 찾아오겠다는 그를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초조한 표정의 중년남자 앞으로 20대 청년이 다가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얀 와이셔츠에 화려한 넥타이를 맨 남자는 손짓으로 앞좌석을 가리켰다. 청년은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그 동안에 욕봤지?”
청년은 한참 침묵하다가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방종업원이 커피잔을 테이블에 놓는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흔들었다. 중년남자는 서서히 말을 시작했고 청년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지난 이야기는 하지 말기로 하자. 숙명이라고 생각하자. 나도 먹고살기 바빠서 눈 돌릴 틈이 없었다. 우선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지.”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가 셋이다. 딸 둘에 아들 하나인데, 아직 어리고......”
청년은 냉소를 흘렸다. 이미 예상된 말이기에 섭섭할 것은 없었다. 그냥 확인사살을 해 본 것에 불과하다. 다방 안에는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잔이라는 노래가 퍼지고 있었다. 그냥 커피나 한잔 마시고 일어서면 되는 것이다. 청년은 더 이상의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질질 짜는 순정파도 아니었다.
*****
에필로그
지금까지 애독하여 주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글이 실화냐는 질문을 쪽지로도 받았습니다. 글을 시작할 때에 밝힌 것처럼 지금까지 올려진 글은 모두가 본인의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세상에는 똑같은 형태는 아니라도 저와 같은 경험을 가진 분들도 무척 많습니다. 지금도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계속 양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를 찾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한국에서 3년간 체류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살고 있는 친척이 귀국하여 조심스럽게 근황을 전했습니다. 미군하고 벌써 이혼했으며 아이들은 모두가 출가했다고 합니다. 다만 막내아들이 마약을 복용하여 무척 고생했다고 하며 독실하게 기독교신앙생활을 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친척도 어머니와 나와의 애증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화도중에 가슴을 치는 한 가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 이야기만 나오면 말이야, 네 엄마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고 말도 횡설수설 하더라.”
실로 통곡입니다. 어머니는 영원한 어머니입니다. 열 손가락 가운데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습니다. 미군 결혼하여 세계를 유랑민처럼 떠돌아 다녔고, 다섯 아이를 키웠습니다. 저의 어머니라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참으로 현명했고 강했습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모정으로 저와 다섯 아이를 모두 감싸 안았고 외로운 이국생활에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홀로 섰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횡설수설하는 말투와 상기된 표정으로 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오십이 넘은 저를 말입니다.
며칠 동안 핸드폰도 꺼놓은 채 두문불출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구상할 필요도 없고 글을 쓰기 위하여 현지를 답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사춘기의 경험이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발자취입니다. 봇물 터지듯 아무런 각본도 없이 그냥 자판을 두드렸습니다. 많이 울면서 썼습니다. 삼십 여 년을 가슴에 묻어온 이야기를 쓰기 위하여 삼년간의 긴 세월을 꾸준히 글만 썼습니다. 비로소 제 가슴을 다 받아 줄 필력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곧바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먼저 썼습니다. 이곳에 올린 글은 어머니 가슴의 천분의 일도, 만분의 일도 안 됩니다. 필설(筆舌)로는 다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님 전 상서
이제부터 어머니는 웃으셔도 됩니다. 철없는 제 가슴에 애(愛)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증(憎)은 없습니다. 오직 어머니를 사모하며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하며 미움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만약에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크게 웃으십시오. 그리고 말씀하세요. “너도 참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러면 저는 또 울음을 터뜨릴 것입니다. 정말 힘든 삶을 살았다고 일부러 투정부리며 어머니의 품을 찾아들겠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단순한 어머니가 아닙니다. 바로 저의 영원한 연인이기도 합니다. 단아한 모습에 빨간 줄무늬의 정장차림, 샌프란시스코의 파란하늘과 쌀쌀한 목소리에 들어있던 포근함, 멀리서도 따듯한 가슴을 던지는 마술,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아름답고 신기할 따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무조건 세계에서 제일가는 미인입니다.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품격이 있습니다. 딱 한 명의 여인이 어머니에 버금가는 미인입니다. 바로 제 딸입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당신의 손녀랍니다.
저는 이 글을 제 자식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얼마나 할머니가 자랑스러운 분인지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똑똑한 할머니, 강한 할머니, 자존심 강했던 할머니, 그 모든 것이 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할머니입니다. 먼 훗날, 저 별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 때는 어머니를 놓지 않고 꽉 붙들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기쁨과 웃음을 가져다주는 아들로 남을 것입니다. 저는 후생을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저 세상에서는 이루어진다고 하더군요. 그 때에 어머니를 뵙겠습니다. 저는 글쟁이입니다. 남들은 저를 수필작가라고 말하더군요. 돈을 많이 버느냐고 묻지는 말아 주세요.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쓸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드리는 시를 하나 올리겠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잠을 깬 새벽하늘로,
눈물바람이 반짝이며 날아오릅니다.
서러움의 눈물이라면,
그리움의 눈물이라면,
바로 당신이 닦아 주어야 할 눈물입니다.
먼 동쪽 하늘에서 솟는 바람이 있다면,
바로 눈물바람입니다.
안타까운 눈물이라면,
가슴 아린 눈물이라면,
제가 닦아 주어야 할 당신의 눈물입니다.
동쪽으로 달리던 눈물바람이,
서쪽으로 달리던 눈물바람이,
태평양에서 서로 만나면,
당신은 왼쪽 날개입니다.
저는 오른쪽 날개입니다.
찬란한 빛을 발하는 나비 한 마리,
파란 하늘 아래
파란 바다 위에
팔랑팔랑 날갯짓
눈물바람이 반짝반짝 날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