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민수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나보다 일 년이나 먼저 미국에 왔고 학교에서는 손꼽는 펜싱선수였다. 샌프란시스코지역의 고등부 펜싱대회에서 상도 많이 탔으며 학교의 펜싱부에서는 미국인 한 명, 중국인 한 명, 그리고 민수가 최고의 검객자리를 다투었다. 민수는 위로 두 명의 형이 있었지만 형제간의 우애가 좋지 않았다. 또한 알몸으로 미국에 건너온 형제들이었다. 용돈을 마음 놓고 달랠 사람도 없었으며 형수와의 관계도 원만치 못했다. 그것이 민수로 하여금 밖으로만 겉돌게 하는 이유였다. 다섯 명의 한국학생 중에서 미국생활에 대한 경험도 제일 많았고 영어도 잘했기 때문에 중심적인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사건은 민수의 애인 때문에 터졌다.
쥬디라고 불려지는 중국여학생과 민수는 애인관계였다. 미국고등학교는 남녀가 함께 공부하기에 여학생과 그런 관계를 맺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자서 떠돌아다니며 공부하는 학생이 이상할 정도였다. 엄격하게 남녀가 구분된 한국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놀란 것이 바로 복도구석에서 부둥켜안고 키스하는 남녀학생이었다. 나는 영어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여자를 사귈 재주가 없었다. 그러나 민수는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며 미국학생처럼 애인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쥬디라는 중국여학생하고 펜싱부의 유력한 라이벌인 중국학생과의 사이에서 삼각관계가 벌어진 것이었다. 외로운 이국생활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쥬디를 넘보는 중국학생을 민수는 가만두지 않았다. 펜싱을 연습하던 체육관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서로가 주먹을 주고받았다. 홧김에 중국학생과 붙었지만 민수는 곧 후회했다. 그 중국학생은 차이나타운에서 악명을 떨치던 블랙자켓이라는 폭력조직원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샌프란시스코의 고등학교에서는 총기사고도 발생했었다. 다른 학교에서 흑인학생이 싸움하다가 권총을 발사해서 상대편이 죽은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흑인학생과 중국학생을 건들이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흑인학생들도 폭력조직을 결성하고 있었으며, 차이나타운의 중국인 폭력단체인 블랙자켓은 성인까지 연결된 조직으로 알려져 있었다. 민수는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주머니에 재크나이프를 가지고 다녔다. 외진 길을 피했으며 항상 우리와 같이 뭉쳐 다니려 했다. 나는 그런 사실도 전혀 몰랐었다. 학교에서 바로 직장으로 달렸고 또한 집에서 시달렸다. 직장에서 쉬는 날이면 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바닷가를 거닐거나 금문공원의 잔디에 누워서 멍청히 하늘만 쳐다보았다.
내가 직장에서 쉬던 어느 날,
나까지 포함하여 다섯 명의 한국학생들은 농구를 하러 차이나타운 체육관으로 놀러갔다. 한바탕 농구를 하고 체육관 마당에 쭉 앉아있는데 저쪽에 보이는 건물에서 이십 여 명의 건장한 중국학생들이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만 민수는 어떤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어? 빨리 튀어, 블랙단이야.”
민수가 깜짝 놀라서 지른 소리였다. 다른 친구들도 그 뜻을 재빨리 알아채고 체육관 문을 빠져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늦게 도망쳤고 네거리에서 나는 다른 친구들이 도망가는 반대방향으로 튀었다. 세 명이 한쪽 방향으로 뛰었는데, 한인교회로 도망치려고 한 것이었다. 내리달리는 세 명을 이십 여 명의 중국학생들이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흔들며 쫓아갔다.
나에게는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쫓아올 이유도 없었다. 맥없이 도망가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언덕 위의 아파트 입구에 숨어서 쫓기는 친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인교회까지 달려간 친구 중에서 한 명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뒤를 쫓아서 교회로 올라가려던 친구 한명이 날아온 쇠파이프로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뒤이어 또 한 명의 친구가 몽둥이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이 보였다. 무자비한 몽둥이와 쇠파이프가 난무했다. 한 순간에 길거리를 피바다로 만든 폭력단은 일제히 차이나타운 골목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꼼짝도 못했다. 백주의 거리에서 린치당하는 장면은 실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현실로 벌어진 이 사태가 믿겨지지 않았다.
마땅히 달려가서 구조를 해야 할 입장이었으나 너무도 엄청난 장면에 무릎이 퍽 꺾이고 말았다. 마침 지나던 캐들락 승용차가 그 옆에 서더니 미국인 노부부가 뛰어 나오며 수건으로 피가 흐르는 친구의 머리를 동여매고 있었다. 잠시 후에 경찰차가 달려오고 앰뷸런스가 사이렌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민수와 준호가 당한 것이었다. 펜싱부에 있던 중국학생은 조직원을 동원하여 민수를 노렸고 그 옆에서 같이 도망가던 준호는 엉뚱하게 당했다. 그 다음 날에 학교에 가니 중국학생들이 슬금슬금 우리를 피해 다녔다.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학교선생님은 한국학생을 모두 불러서 진상을 조사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조간신문과 텔레비전뉴스에 그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민수와 준호는 머리를 수십 바늘씩 꿰매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그날 밤에 이 사건을 알은 엉클과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고 엉클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사건이 터진 장소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따졌다. 엉클은 집중적으로 나를 심문했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통역을 맡았다. 그러나 흘러가는 핵심은 사건의 진상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대로 미국에 남아있는 자체가 문제였다. 내가 폭력조직과 연루되면 엉클은 직업군인으로서 문책을 받는다는 전제하에 진행된 일종의 청문회였다. 나를 한국으로 내보내려는 엉클의 강력한 의도와 그것을 막으려는 어머니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모든 폭풍은 나에게 떨어졌다.
“너 어떻게 할래? 미국에 이런 짓 하려고 온 거야?”
엉클이 한참동안 나를 문책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나에게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크게 뜬 눈에는 불길이 확확 타오르고 벌떡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마구 서성거렸다. 나는 아무런 연관도 되어있지 않은 일이었지만 몰아치는 기세에 눌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눈물만 흘리던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한국으로 나갈게요. 이제 속을 그만 썩이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머니는 정말로 미치광이가 된 것 같았다. 눈에 타오르는 불길이 이제는 파란빛을 발하며 뿜어지는 광경이었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마구 몰아치는 광경은 한꺼번에 터지는 분노였다.
“한국으로 나가? 그래, 한국으로 나가면 뭐가 되려고?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일이라도 당장에 보내줄게. 거지새끼로 길바닥에 나가 자빠져도 나는 모르는 일이니깐 그렇게 알아.”
어머니는 엉클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미치광이 같은 표정으로 나에게 퍼부어대며 엉클에게 제발 나를 내보내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눈물만 펑펑 쏟았다. 앞뒤가 마구 바뀌는 말을 토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의 몸부림에 분노하고 있었다. 신문 뭉치를 들어서 내 머리를 마구 때리는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엉클은 주방에서 물건 깨지는 소리를 듣고 방에서 뛰어 나오더니 펄펄 날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흥분했다. 마치 자기의 아내를 미치광이처럼 만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듯이 어머니와 합세하여 나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서슬이 퍼런 파란색 눈빛이 온 몸을 더듬으며 단호하고 딱딱 떨어지는 말투로 도대체 네가 뭔데 이 사람을 이렇게 흥분하게 만드느냐고 밀어붙였다. 또 엉클은 말했다. 자기도 아내에게는 이 정도로 화를 내게 하지 않는데 네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자기의 아내를 화나게 하냐고 따졌다. 나는 낮선 사람들에게 몰매 맞는 기분이었다. 나란히 서서 손가락질 하는 미국남자와 한국여자가 있고, 그 사람들은 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펑펑 쏟았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이글이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에게는 인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먼 타인이었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나보다는 귀여운 자식이 옆에서 재롱을 떨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자식하고만 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밤안개를 적시는 창가의 따듯한 불빛은 임자가 따로 있고, 나는 먼발치에서 불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나그네다. 체념만이 내 인생이다. 내 운명은 거리의 이방인처럼 살아야 하고 그 누구의 사랑이나 행복도 부러워하면 안 된다. 나뭇가지에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나였다. 내 몸에는 따듯한 피 대신에 차가운 수액만이 흐르고, 탄력 있는 살결이 아니라 딱딱한 소나무 껍질로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나는 너무도 힘이 없었다. 저항할 힘도 없었고 내 운명을 내가 결정할 힘도 없었다. 오직 다른 사람에 의하여 내 운명이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절망할 뿐이었다. 새벽 두시까지 몰리다가 온 몸의 기운이 빠진 채 방에 들어왔다. 밖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멀리서 사나운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눈물은 말랐다. 더 이상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허탈하기만 한 가슴을 못 이겨 창가에 팔을 베고 엎드렸다.
쥬디라고 불려지는 중국여학생과 민수는 애인관계였다. 미국고등학교는 남녀가 함께 공부하기에 여학생과 그런 관계를 맺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자서 떠돌아다니며 공부하는 학생이 이상할 정도였다. 엄격하게 남녀가 구분된 한국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놀란 것이 바로 복도구석에서 부둥켜안고 키스하는 남녀학생이었다. 나는 영어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여자를 사귈 재주가 없었다. 그러나 민수는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며 미국학생처럼 애인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쥬디라는 중국여학생하고 펜싱부의 유력한 라이벌인 중국학생과의 사이에서 삼각관계가 벌어진 것이었다. 외로운 이국생활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쥬디를 넘보는 중국학생을 민수는 가만두지 않았다. 펜싱을 연습하던 체육관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서로가 주먹을 주고받았다. 홧김에 중국학생과 붙었지만 민수는 곧 후회했다. 그 중국학생은 차이나타운에서 악명을 떨치던 블랙자켓이라는 폭력조직원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샌프란시스코의 고등학교에서는 총기사고도 발생했었다. 다른 학교에서 흑인학생이 싸움하다가 권총을 발사해서 상대편이 죽은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흑인학생과 중국학생을 건들이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흑인학생들도 폭력조직을 결성하고 있었으며, 차이나타운의 중국인 폭력단체인 블랙자켓은 성인까지 연결된 조직으로 알려져 있었다. 민수는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주머니에 재크나이프를 가지고 다녔다. 외진 길을 피했으며 항상 우리와 같이 뭉쳐 다니려 했다. 나는 그런 사실도 전혀 몰랐었다. 학교에서 바로 직장으로 달렸고 또한 집에서 시달렸다. 직장에서 쉬는 날이면 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바닷가를 거닐거나 금문공원의 잔디에 누워서 멍청히 하늘만 쳐다보았다.
내가 직장에서 쉬던 어느 날,
나까지 포함하여 다섯 명의 한국학생들은 농구를 하러 차이나타운 체육관으로 놀러갔다. 한바탕 농구를 하고 체육관 마당에 쭉 앉아있는데 저쪽에 보이는 건물에서 이십 여 명의 건장한 중국학생들이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만 민수는 어떤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어? 빨리 튀어, 블랙단이야.”
민수가 깜짝 놀라서 지른 소리였다. 다른 친구들도 그 뜻을 재빨리 알아채고 체육관 문을 빠져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늦게 도망쳤고 네거리에서 나는 다른 친구들이 도망가는 반대방향으로 튀었다. 세 명이 한쪽 방향으로 뛰었는데, 한인교회로 도망치려고 한 것이었다. 내리달리는 세 명을 이십 여 명의 중국학생들이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흔들며 쫓아갔다.
나에게는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쫓아올 이유도 없었다. 맥없이 도망가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언덕 위의 아파트 입구에 숨어서 쫓기는 친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인교회까지 달려간 친구 중에서 한 명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뒤를 쫓아서 교회로 올라가려던 친구 한명이 날아온 쇠파이프로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뒤이어 또 한 명의 친구가 몽둥이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이 보였다. 무자비한 몽둥이와 쇠파이프가 난무했다. 한 순간에 길거리를 피바다로 만든 폭력단은 일제히 차이나타운 골목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꼼짝도 못했다. 백주의 거리에서 린치당하는 장면은 실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현실로 벌어진 이 사태가 믿겨지지 않았다.
마땅히 달려가서 구조를 해야 할 입장이었으나 너무도 엄청난 장면에 무릎이 퍽 꺾이고 말았다. 마침 지나던 캐들락 승용차가 그 옆에 서더니 미국인 노부부가 뛰어 나오며 수건으로 피가 흐르는 친구의 머리를 동여매고 있었다. 잠시 후에 경찰차가 달려오고 앰뷸런스가 사이렌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민수와 준호가 당한 것이었다. 펜싱부에 있던 중국학생은 조직원을 동원하여 민수를 노렸고 그 옆에서 같이 도망가던 준호는 엉뚱하게 당했다. 그 다음 날에 학교에 가니 중국학생들이 슬금슬금 우리를 피해 다녔다.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학교선생님은 한국학생을 모두 불러서 진상을 조사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조간신문과 텔레비전뉴스에 그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민수와 준호는 머리를 수십 바늘씩 꿰매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그날 밤에 이 사건을 알은 엉클과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고 엉클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사건이 터진 장소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문제 삼아 따졌다. 엉클은 집중적으로 나를 심문했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통역을 맡았다. 그러나 흘러가는 핵심은 사건의 진상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대로 미국에 남아있는 자체가 문제였다. 내가 폭력조직과 연루되면 엉클은 직업군인으로서 문책을 받는다는 전제하에 진행된 일종의 청문회였다. 나를 한국으로 내보내려는 엉클의 강력한 의도와 그것을 막으려는 어머니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모든 폭풍은 나에게 떨어졌다.
“너 어떻게 할래? 미국에 이런 짓 하려고 온 거야?”
엉클이 한참동안 나를 문책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나에게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크게 뜬 눈에는 불길이 확확 타오르고 벌떡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마구 서성거렸다. 나는 아무런 연관도 되어있지 않은 일이었지만 몰아치는 기세에 눌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눈물만 흘리던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한국으로 나갈게요. 이제 속을 그만 썩이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머니는 정말로 미치광이가 된 것 같았다. 눈에 타오르는 불길이 이제는 파란빛을 발하며 뿜어지는 광경이었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마구 몰아치는 광경은 한꺼번에 터지는 분노였다.
“한국으로 나가? 그래, 한국으로 나가면 뭐가 되려고?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일이라도 당장에 보내줄게. 거지새끼로 길바닥에 나가 자빠져도 나는 모르는 일이니깐 그렇게 알아.”
어머니는 엉클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미치광이 같은 표정으로 나에게 퍼부어대며 엉클에게 제발 나를 내보내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눈물만 펑펑 쏟았다. 앞뒤가 마구 바뀌는 말을 토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의 몸부림에 분노하고 있었다. 신문 뭉치를 들어서 내 머리를 마구 때리는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엉클은 주방에서 물건 깨지는 소리를 듣고 방에서 뛰어 나오더니 펄펄 날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흥분했다. 마치 자기의 아내를 미치광이처럼 만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듯이 어머니와 합세하여 나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서슬이 퍼런 파란색 눈빛이 온 몸을 더듬으며 단호하고 딱딱 떨어지는 말투로 도대체 네가 뭔데 이 사람을 이렇게 흥분하게 만드느냐고 밀어붙였다. 또 엉클은 말했다. 자기도 아내에게는 이 정도로 화를 내게 하지 않는데 네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자기의 아내를 화나게 하냐고 따졌다. 나는 낮선 사람들에게 몰매 맞는 기분이었다. 나란히 서서 손가락질 하는 미국남자와 한국여자가 있고, 그 사람들은 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펑펑 쏟았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이글이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에게는 인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먼 타인이었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나보다는 귀여운 자식이 옆에서 재롱을 떨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자식하고만 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밤안개를 적시는 창가의 따듯한 불빛은 임자가 따로 있고, 나는 먼발치에서 불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나그네다. 체념만이 내 인생이다. 내 운명은 거리의 이방인처럼 살아야 하고 그 누구의 사랑이나 행복도 부러워하면 안 된다. 나뭇가지에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나였다. 내 몸에는 따듯한 피 대신에 차가운 수액만이 흐르고, 탄력 있는 살결이 아니라 딱딱한 소나무 껍질로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나는 너무도 힘이 없었다. 저항할 힘도 없었고 내 운명을 내가 결정할 힘도 없었다. 오직 다른 사람에 의하여 내 운명이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절망할 뿐이었다. 새벽 두시까지 몰리다가 온 몸의 기운이 빠진 채 방에 들어왔다. 밖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멀리서 사나운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눈물은 말랐다. 더 이상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허탈하기만 한 가슴을 못 이겨 창가에 팔을 베고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