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동안 계속 꽃 피는 도시가 샌프란시스코다. 일년 내내 한국의 초가을 날씨가 계속되었고 얇은 잠바 하나만 사면 계절에 상관없이 그것으로 때웠다. 그 도시는 지구에서 가장 온화한 곳이었으며 깨끗했다. 미찌꼬는 공휴일에 자기의 가족하고 앤젤스섬이라는 곳으로 놀러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처음으로 하루를 시간 내어서 놀러가자는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그 때에 나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학교나 직장에서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지만 표정과 행동은 시들해져 갔다. 미찌꼬의 예리한 시각은 나의 그림자를 꿰뚫고 있었다. 미찌꼬는 자기와 남편, 그리고 15살 된 딸과 같이 놀러가자고 했다.
금문교가 보이는 포구에서 배를 탔다. 미찌꼬의 남편은 무척 명랑해 보였으며 장난기도 많았다. 오색 풍선을 여러 개 사서 온 몸에 매달았다. 그가 걸어가면 풍선에 매달린 몸이 둥둥 떠가는 것 같았다. 하얀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미찌꼬는 하얗게 웃으며 따랐고, 노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애니라는 그녀의 딸이 카메라를 들고 마구 사진을 찍어댔다. 배는 알 카포네가 갇혀 있었다는 섬을 지나서 금문교를 빠져나갔다.
명랑한 남편과 화사한 아내, 그리고 까불대며 좋아하는 딸,
나는 뱃전에 기대어 한 가족의 행복을 보고 있었다. 파파와 마마를 마음 놓고 마구 불러대는 애니의 행복이 나의 그림자로 사무쳐왔다. 미찌꼬는 애니에게 나를 책임지고 가이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애니는 스스럼없이 내 손을 잡고는 끌고 가더니 뱃머리에 서라고 했다. 그리고 긴 머리를 날리며 카메라를 눈에 대었다. Hey Lee, Smile...... Smile...... 하며 찰칵 사진을 찍었다.
앤젤스섬은 무인도였다. 태평양의 푸른 파도가 쏴 소리를 내며 밀려오고 있었다. 행락객들은 여기저기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고 하얀 날개를 펄럭거리며 새들이 무리지어 날았다. 애니의 부모는 팔짱을 끼고 저쯤 떨어진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나와 애니는 투명한 바닷물을 휘저으며 모래 속에 파묻힌 조개를 찾았다. 허벅지까지 청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속을 더듬거리던 애니가 나를 향하여 소리 질렀다. 번쩍 쳐든 그의 손에는 커다란 조개가 쥐어져 있었다. 풍덩풍덩 나에게 뛰어오더니 활짝 웃으며 잡힌 조개를 내밀었다. 무척 큰 조개였다. 나는 미국조개라서 이렇게 큰 모양이라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한국에는 아주 작은 조개만 살지 이렇게 큰 조개는 없다고 말했다. 애니는 얼마나 작으냐고 물었다. 거기서 영어가 탁 막혔다. 얼마나 작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주 작다고만 했다. 애니는 조그만 손바닥을 펴더니 중간 부분을 다른 손의 손가락을 갖다대며 이만하냐고 물었다. 더 작다고 했다. 손가락을 그의 반까지 좁히면서 이만하냐고 또 물었다. 그것보다도 더 작다고 또 말했다. 나에게 여자의, 그것도 이성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소녀의 물에 젖은 손바닥이 눈부심으로 다가왔다.
애니는 내 손을 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해변의 바위틈을 비집고 다녔으며 찰랑찰랑 밀려오는 파도를 밟으며 마구 뛰었다. 불쑥 나오기 시작한 가슴과 미끈하게 뻗은 하얀 다리는 그 동안에 느끼지 못했던 야릇한 감정으로 가슴에 담겨졌다. 미찌꼬와 그녀의 남편이 한 쌍이 되어 날았고, 나와 애니도 한 쌍이 되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바닷새 같았다. 애니와 나는 점심을 먹은 후에 백사장에서 뒹굴렀다. 애니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손짓까지 하며 천천히 말했다. 백사장에서 뒹굴던 애니는 별안간 눈썹을 찡긋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새똥이 소란스럽게 흔들던 애니의 무릎에 납작하게 달라붙었던 것이었다. 하얀 무릎을 내 앞에 내밀고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애니의 손을 잡았다. 물가로 데려가서 서 있으라고 하고는 애니의 무릎을 물로 씻어 주었다. 한 손으로 애니의 통통한 종아리를 잡고 또 한 손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이것이 평생을 지속해야 하는 부부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설렘이 바닷바람에 날고 한 쌍의 바닷새에 둘의 모습을 투영시키며, 내 손으로 해도 될 일을 일부러 상대방에게 요구하며 투정부리는 모습이 영원한 부부의 모습일 것이다. 나는 부부의 사이에 끼어든 방해자였다. 멀리 다정한 폼으로 팔짱을 끼고 걷는 미찌꼬와 그의 남편 사이에 끼어든 이방인일 뿐이었다. 어머니와 엉클은 이렇게 창공을 날아다니며 즐겁게 사는 것인데......
미찌꼬가 운전하는 차는 해변을 돌아서 내가 내릴 장소에 섰다. 집 앞에서 내리다가 어머니의 눈에라도 띄면 큰일 날 것만 같아서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게 했다. 애니는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뜨지도 못하고 Good-bye라는 말만 던졌다. 차에서 내리자 미찌꼬도 따라 내리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근심어린 눈빛이었다. 나는 근심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내 어두운 표정을 미찌꼬는 이미 읽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찌꼬는 자신의 어릴 적 아픔을 느꼈던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 한 점 우수가 스쳐 보였다. 미찌꼬의 차 뒤에 붙은 빨간 미등이 멀리 해변을 돌아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런 행복으로 내가 살 수 있을까, 세상은 딱 두개의 계곡으로 갈려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 능선 아래는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고, 이쪽 능성 아래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곡은 사우스코리아와 노스코리아를 가르는 철조망처럼 서로가 침범하지 못하게 우뚝 솟은 능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터덜터덜 가로등을 지나 집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와 엉클, 그리고 다섯 아이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떠들고 있었다. 멀리서 고갯짓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과 나 사이는 이미 분리되어 있었기에 특별히 즐거운 좌석에 낄 일은 없었다. 다만 그 틈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동자만이 샛별처럼 빛났다. 계속적인 불안에 시달리면 직감이 발달되는 법이다. 그 직감은 신기할 정도로 잘 들어맞았다. 엉클은 어떤 계기를 노리고 있는 느낌이고 어머니는 쩔쩔 매고 있었다. 엉클은 적군을 향하여 포격을 가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다음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 것이니 미리 피하라고 좌표까지 따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알아서 움직였다. 될 수 있으면 모두의 눈에 안 띄려고 노력했고 집에서도 내 방에서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같은 방을 쓰는 9살 자리 아이가 문제였다. 그는 방을 들락거리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일일이 고자질 했고 놀림감으로 나를 몰아갔다. 침울하고, 말없고, 공부하지 않으면 누워서 자고 있고, 기껏해야 화장실이나 들락거리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아이들은 재미가 없으면 나를 불러내어 같이 놀자고 대들었다. 나는 트집을 안 잡히려고 노력했다. 조용히 들어와서 잠만 자다가 그림자처럼 새벽에 사라질 뿐이고, 한달에 80달러씩의 생활비를 보탤 뿐이었다.
상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은 듯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엉클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비굴해 보이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약점을 잡힌 어머니는 엉클에게 질질 끌려가는 것 같았다. 물론 엉클을 대하는 내 표정도 비굴했고 그것 때문에 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비굴해진다는 현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람이 나의 어머니라고 비호하며 나설 수도 없었다. 나만이 아니라 다섯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성깔이 깐깐하고 매사에 남들의 트집을 안 잡히는 어머니로서는 대단한 자존심의 문제였다. 속았다는 엉클의 분노가 어머니에게 전달되고, 나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에 자신에 대한 분노까지 겹쳐서 증폭된 어머니의 분노가 나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세상천지에 대한 분노로 가슴을 쓸어내렸고 메마른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어쩌다가 어머니와 단 둘이서 언쟁이 붙으면 어머니는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자신이 비굴해진다는 것에 대하여 극도의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언 미국에 온지도 일년이 가까워왔다. 빛과 그림자의 생활에 찌들었지만 나는 잘 버티고 있었다. 분노도 폭발시키지 않았으며 더 이상 비굴해지지도 않았다. 틀에 박힌 나날을 되풀이하고 엉클에게 트집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나의 이런 태도가 엉클에게는 더욱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가 안 보였다. 한 방을 날리면 정확하게 적군의 머리위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엉클의 답답함이 내가 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큰 목소리로 어머니와 다투는 일도 만들었다. 거실 건너편에서 다투는 어머니와 엉클의 목소리가 방에 들려왔다. 어느 정도 눈치영어가 숙달된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간단한 상황이었다. 알아서 항복하라는 뜻이다. 백기를 들고 한국으로 나가달라는 말이었다.
내 입에서는 한국으로 나가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마음은 한국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쫓겨나듯 나갈 수는 없었으며 17년 만에 자신의 그늘 아래로 나를 데려온 어머니의 마음을 무시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엉클은 깃발을 들었고, 어머니는 깃발을 뺏으려 몸부림치면서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갔다. 나는 피폐되어가는 가슴으로 옹골진 오기를 보이며 더욱 표정 없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엉클이 승리할 수 있는 폭탄이 내 머리위에서 폭발했다. 어머니를 침묵시키고 정당한 이유를 붙여서 나를 쫓아 낼 수 있는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엉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금문교가 보이는 포구에서 배를 탔다. 미찌꼬의 남편은 무척 명랑해 보였으며 장난기도 많았다. 오색 풍선을 여러 개 사서 온 몸에 매달았다. 그가 걸어가면 풍선에 매달린 몸이 둥둥 떠가는 것 같았다. 하얀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미찌꼬는 하얗게 웃으며 따랐고, 노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애니라는 그녀의 딸이 카메라를 들고 마구 사진을 찍어댔다. 배는 알 카포네가 갇혀 있었다는 섬을 지나서 금문교를 빠져나갔다.
명랑한 남편과 화사한 아내, 그리고 까불대며 좋아하는 딸,
나는 뱃전에 기대어 한 가족의 행복을 보고 있었다. 파파와 마마를 마음 놓고 마구 불러대는 애니의 행복이 나의 그림자로 사무쳐왔다. 미찌꼬는 애니에게 나를 책임지고 가이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애니는 스스럼없이 내 손을 잡고는 끌고 가더니 뱃머리에 서라고 했다. 그리고 긴 머리를 날리며 카메라를 눈에 대었다. Hey Lee, Smile...... Smile...... 하며 찰칵 사진을 찍었다.
앤젤스섬은 무인도였다. 태평양의 푸른 파도가 쏴 소리를 내며 밀려오고 있었다. 행락객들은 여기저기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고 하얀 날개를 펄럭거리며 새들이 무리지어 날았다. 애니의 부모는 팔짱을 끼고 저쯤 떨어진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나와 애니는 투명한 바닷물을 휘저으며 모래 속에 파묻힌 조개를 찾았다. 허벅지까지 청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속을 더듬거리던 애니가 나를 향하여 소리 질렀다. 번쩍 쳐든 그의 손에는 커다란 조개가 쥐어져 있었다. 풍덩풍덩 나에게 뛰어오더니 활짝 웃으며 잡힌 조개를 내밀었다. 무척 큰 조개였다. 나는 미국조개라서 이렇게 큰 모양이라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한국에는 아주 작은 조개만 살지 이렇게 큰 조개는 없다고 말했다. 애니는 얼마나 작으냐고 물었다. 거기서 영어가 탁 막혔다. 얼마나 작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주 작다고만 했다. 애니는 조그만 손바닥을 펴더니 중간 부분을 다른 손의 손가락을 갖다대며 이만하냐고 물었다. 더 작다고 했다. 손가락을 그의 반까지 좁히면서 이만하냐고 또 물었다. 그것보다도 더 작다고 또 말했다. 나에게 여자의, 그것도 이성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소녀의 물에 젖은 손바닥이 눈부심으로 다가왔다.
애니는 내 손을 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해변의 바위틈을 비집고 다녔으며 찰랑찰랑 밀려오는 파도를 밟으며 마구 뛰었다. 불쑥 나오기 시작한 가슴과 미끈하게 뻗은 하얀 다리는 그 동안에 느끼지 못했던 야릇한 감정으로 가슴에 담겨졌다. 미찌꼬와 그녀의 남편이 한 쌍이 되어 날았고, 나와 애니도 한 쌍이 되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바닷새 같았다. 애니와 나는 점심을 먹은 후에 백사장에서 뒹굴렀다. 애니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손짓까지 하며 천천히 말했다. 백사장에서 뒹굴던 애니는 별안간 눈썹을 찡긋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새똥이 소란스럽게 흔들던 애니의 무릎에 납작하게 달라붙었던 것이었다. 하얀 무릎을 내 앞에 내밀고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애니의 손을 잡았다. 물가로 데려가서 서 있으라고 하고는 애니의 무릎을 물로 씻어 주었다. 한 손으로 애니의 통통한 종아리를 잡고 또 한 손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이것이 평생을 지속해야 하는 부부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설렘이 바닷바람에 날고 한 쌍의 바닷새에 둘의 모습을 투영시키며, 내 손으로 해도 될 일을 일부러 상대방에게 요구하며 투정부리는 모습이 영원한 부부의 모습일 것이다. 나는 부부의 사이에 끼어든 방해자였다. 멀리 다정한 폼으로 팔짱을 끼고 걷는 미찌꼬와 그의 남편 사이에 끼어든 이방인일 뿐이었다. 어머니와 엉클은 이렇게 창공을 날아다니며 즐겁게 사는 것인데......
미찌꼬가 운전하는 차는 해변을 돌아서 내가 내릴 장소에 섰다. 집 앞에서 내리다가 어머니의 눈에라도 띄면 큰일 날 것만 같아서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게 했다. 애니는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뜨지도 못하고 Good-bye라는 말만 던졌다. 차에서 내리자 미찌꼬도 따라 내리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근심어린 눈빛이었다. 나는 근심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내 어두운 표정을 미찌꼬는 이미 읽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찌꼬는 자신의 어릴 적 아픔을 느꼈던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 한 점 우수가 스쳐 보였다. 미찌꼬의 차 뒤에 붙은 빨간 미등이 멀리 해변을 돌아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런 행복으로 내가 살 수 있을까, 세상은 딱 두개의 계곡으로 갈려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 능선 아래는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고, 이쪽 능성 아래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곡은 사우스코리아와 노스코리아를 가르는 철조망처럼 서로가 침범하지 못하게 우뚝 솟은 능선으로 분리되어 있다.
터덜터덜 가로등을 지나 집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와 엉클, 그리고 다섯 아이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떠들고 있었다. 멀리서 고갯짓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과 나 사이는 이미 분리되어 있었기에 특별히 즐거운 좌석에 낄 일은 없었다. 다만 그 틈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동자만이 샛별처럼 빛났다. 계속적인 불안에 시달리면 직감이 발달되는 법이다. 그 직감은 신기할 정도로 잘 들어맞았다. 엉클은 어떤 계기를 노리고 있는 느낌이고 어머니는 쩔쩔 매고 있었다. 엉클은 적군을 향하여 포격을 가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다음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 것이니 미리 피하라고 좌표까지 따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알아서 움직였다. 될 수 있으면 모두의 눈에 안 띄려고 노력했고 집에서도 내 방에서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같은 방을 쓰는 9살 자리 아이가 문제였다. 그는 방을 들락거리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일일이 고자질 했고 놀림감으로 나를 몰아갔다. 침울하고, 말없고, 공부하지 않으면 누워서 자고 있고, 기껏해야 화장실이나 들락거리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아이들은 재미가 없으면 나를 불러내어 같이 놀자고 대들었다. 나는 트집을 안 잡히려고 노력했다. 조용히 들어와서 잠만 자다가 그림자처럼 새벽에 사라질 뿐이고, 한달에 80달러씩의 생활비를 보탤 뿐이었다.
상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은 듯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엉클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비굴해 보이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약점을 잡힌 어머니는 엉클에게 질질 끌려가는 것 같았다. 물론 엉클을 대하는 내 표정도 비굴했고 그것 때문에 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비굴해진다는 현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람이 나의 어머니라고 비호하며 나설 수도 없었다. 나만이 아니라 다섯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성깔이 깐깐하고 매사에 남들의 트집을 안 잡히는 어머니로서는 대단한 자존심의 문제였다. 속았다는 엉클의 분노가 어머니에게 전달되고, 나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에 자신에 대한 분노까지 겹쳐서 증폭된 어머니의 분노가 나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세상천지에 대한 분노로 가슴을 쓸어내렸고 메마른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어쩌다가 어머니와 단 둘이서 언쟁이 붙으면 어머니는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자신이 비굴해진다는 것에 대하여 극도의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언 미국에 온지도 일년이 가까워왔다. 빛과 그림자의 생활에 찌들었지만 나는 잘 버티고 있었다. 분노도 폭발시키지 않았으며 더 이상 비굴해지지도 않았다. 틀에 박힌 나날을 되풀이하고 엉클에게 트집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나의 이런 태도가 엉클에게는 더욱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가 안 보였다. 한 방을 날리면 정확하게 적군의 머리위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엉클의 답답함이 내가 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큰 목소리로 어머니와 다투는 일도 만들었다. 거실 건너편에서 다투는 어머니와 엉클의 목소리가 방에 들려왔다. 어느 정도 눈치영어가 숙달된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간단한 상황이었다. 알아서 항복하라는 뜻이다. 백기를 들고 한국으로 나가달라는 말이었다.
내 입에서는 한국으로 나가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마음은 한국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쫓겨나듯 나갈 수는 없었으며 17년 만에 자신의 그늘 아래로 나를 데려온 어머니의 마음을 무시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엉클은 깃발을 들었고, 어머니는 깃발을 뺏으려 몸부림치면서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갔다. 나는 피폐되어가는 가슴으로 옹골진 오기를 보이며 더욱 표정 없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엉클이 승리할 수 있는 폭탄이 내 머리위에서 폭발했다. 어머니를 침묵시키고 정당한 이유를 붙여서 나를 쫓아 낼 수 있는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엉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