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눈물바람 (7)

by 송보호 posted Apr 2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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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가 자기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고 말했었다.  의문을 품었다.  내가 어떻게 했기에 어머니의 가슴에 못질을 했다는 말인가,  어떤 부모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절대로 이런 지경으로 세상에 머리를 내밀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태어나게 한 사람은 누구인가,  멋모르고 태어나서 그저 미안할 뿐이다.  정말로 태어나서 죄송할 뿐이다.  내 가슴에도 분노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파란 엉클 앞에서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고개 숙여야 하며 미친 듯이 몰아치는 어머니 앞에서도 침묵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수치심으로 온 몸을 휘감았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당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바로 증오였다.  나의 비굴함에 대한 증오도 포함된 증오였다.
나의 증오는 어머니 앞에서 침묵으로 반항했다.  쏘듯 쳐다보는 어머니의 시선을 철저하게 피하는 것으로 표출했다.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지우려했다.  가끔 나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김치찌개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나를 몰아치던 날에 어머니는 김치찌개를 새로 만들어 놓았었다.  너무도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눈물만 그렁그렁 보이며 크게 떠 있던 내 눈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몰아친 후의 깊은 밤에 김치찌개를 새로 끓였고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다른 차원의 해결점을 향하여 나도 모르게 발을 딛고 있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내가 사라져야 한다는 현실만 생각했고 나는 세상에 태어나면 안 될 운명이었다는 확신이었다.  방황은 계속 되었다.  이제는 어머니를 완전히 닮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증오의 대상이었다.  

직장에서 쉬는 날에 학교를 나서며 준호와 버스를 탔다.  금문공원(Gloden Gate Park)으로 향했다.  길이가 몇 키로나 되는 잘 다듬어진 공원의 오솔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준호는 나와 같은 반이었다.  어머니는 은행에 다니고 아버지는 자동차 엔진니어로 야간근무만 했다.  준호는 무척 쓸쓸해 보였다.  나는 그 표정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따로따로 놀았다.  먼저 미국에 온 어머니는 이미 내연의 남자가 있었고, 나중에 도착한 아버지는 이 사실을 묵인하고 역시 다른 여자와 내연의 관계를 맺었다.  오직 준호와 그 여동생 때문에 겉으로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출근한 뒤에 야근을 마친 아버지가 퇴근하여 들어왔다.  저녁이면 아버지가 출근한 후에 어머니가 퇴근하여 돌아왔다.  한 달 내내 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었다.  엇갈리는 부부형태를 유지하며 아이들이 크기만 바라고 있었다.  부부싸움 자체가 없었으며 해 봐야 무의미했기에 무척 평온하게 보였다.  그러나 안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이 이미 틈을 벌리고 있었다.  

우리는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다른 미국학생들은 애인에 관심을 가지며 멋을 내고 다녔지만 우리는 오직 안으로만 곪아터진 상처에 신음하고 있었다.  숲에서 들리는 미국인들의 맑은 웃음소리 뒤로 우리의 쓴 미소가 흘렀다.  준호는 밖에서도 말이 없었다.  부모라는 하나의 봉우리가 아닌 동떨어진 아버지의 봉우리와 어머니의 봉우리 사이에서 방황하기만 했다.  너무도 침울한 맑은 날이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깊은 바다를 깨뜨리듯 내가 말했다.  순간적으로 준호의 눈이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물었다.
“한국에는 누가 있는데?”
“아버지가 있다고 하는데, 얼굴도 몰라.  찾아봐야 별 볼일 없을 것 같아.”
“응, 그렇구나......”
준호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찾아 볼 사람도 있겠지만 준호는 찾아 볼 사람조차도 없었다.  준호의 부모는 잿빛이었다.  그의 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로따로 존재했지 부부는 실종된 상태였다.  그래서 준호는 부모를 “부와 모”라고 따로 지칭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찾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도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을 것이다.  내가 나타나봐야 서로 얼싸안을 일은 없다.  만나서 반가워할 사람 같으면 벌써 나를 찾았을 것이지만, 이미 그쪽도 내 아버지로서는 물 건너간 상황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나는 분명히 잘못 태어난 것이었다.  하나님이 점지를 잘못해서 나를 낳아준 사람은 있어도 부모는 없었다.  준호와 나는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서로가 힘없는 발길로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떨어진 운명에 저항하기는 우리가 너무도 역부족이라는 현실만 느꼈을 뿐이었다.

시간이 나면 다운타운 근처의 싸구려 월세방을 뒤지며 다녔다.  편하게 쉴 수 있는 내 공간을 마련하려했다.  마약이나 알콜중독자, 그리고 동성연애자들이 없는 원룸빌딩을 찾았다.  그런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는 원룸빌딩에 들어가서 방안을 구경했다.  조그만 침대 하나, 책상과 옷장 하나, 그리고 냉장고 하나가 아늑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달에 80달러를 내면 된다고 주인은 말했다.  나는 그 방에 한참을 홀로 앉아있었다.  앞으로는 몸이 아파서도 안 되며 돈이 떨어져도 안 된다.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사람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고 그들은 완전히 이방인들이라는 사실이 슬픔으로 밀려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화려하지도 않았고 풍성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독한 나라였다.  복도를 지나는 옆방 사람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영국계 미국인 같았다.  저들은 내가 어떤 일을 당하든 그냥 냄새나는 동양인일 뿐이다.  그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눈을 내리깔고 하는 내 말을 어머니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워낙 내 표정이 무겁고 심각했기에 어머니는 한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한참을 말하고 있는데 미군제복을 입은 엉클이 퇴근하여 들어섰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엉클은 어머니 옆에 앉았다.  한국말로 주고받는 우리를 파란 눈으로 번갈아 보면서 무슨 말을 나누고 있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내가 따로 방을 얻어 나갈 것이라는 말을 통역했다.  엉클은 그 말을 듣자마자 한마디로 노우라고 했다.  집에서 나갈 수 없다고 내가 알아들을 만큼 천천히, 그리고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빠른 영어를 한참을 주고받았다.  엉클과 말하면서 어머니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상기되었다.  언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엉클은 벌떡 일어서며 어머니에게 두 손을 흔들며 내치듯 말하고 나더니, 나를 향하여 큰 목소리로 절대로 내 보내줄 수 없다고 또박또박 영어로 말했다.  마지막 말은 딱 한마디, You can't.였다.

여기서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구체적인 언어로 표시된 나의 첫 반항이었다.  Why......?  왜 못나가게 하냐고 엉클의 파란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어머니가 급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내 나이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따로 나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두가 엉클의 책임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엉클은 나의 양아버지였다.  나를 미국으로 데려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 신원을 보증한 사람이었다.  엉클은 흥분된 표정으로 또 어머니에게 빠른 영어로 말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극도로 상기되었다.  엉클이 자기 할말을 다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또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정 내가 집에서 나가고 싶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엉클이 말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눈동자...... 그 눈동자에는 뚝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파도치고 있었다.  

나는 알아챘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하는 어머니의 말에는 엉클이 나를 싫어하며 다시 한국으로 내 보내고 싶어 한다는 뜻이 들어있었다.  모든 것은 결정 난 상황이었다.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어머니 앞에서 벌어질 줄은 몰랐다.  조용히 나 혼자서 물러나려고 방을 얻어나가려고 했지만 엉클은 단순히 내가 집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별안간 어머니의 품을 느꼈다.  같이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이 무척 따스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나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때로는 잡아먹을 듯한 애증이 서린 자식이지만 차마 곁에서 떠나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엉클이 어떤 작전지도를 그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를 자기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숨겨온 어머니에 대한 보복 같은 것을 느꼈다.  서서히 어머니를 조여서 기어이 나를 곁에서 떨어뜨리게 하려는 작전을 수행하는 것 같았다.  

그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냄비뚜껑을 열자 그 속에는 미역국이 끓여져 있었다.  나도 기억 못했던 나의 음력생일이었다.  그 옆의 하얀 봉투 속에는 10달러 자리 파란 지폐가 들어있었다.  가슴 속에 쌓였던 증오가 한꺼번에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미역국을 뜨는 순간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어머니는 따듯한 품으로, 애틋한 모정으로, 결코 떠나보낼 수 없다는 가슴으로, 그렇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