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만 기억에 남아야 한다. 미국생활을 그나마 아름답게 느낄 수 있게 했던 몇 사람이 있었고, 거리와 풍경이 있다. 어머니가 나에게 극과 극을 달렸듯이 나도 찬란한 빛과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달렸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는 하나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눈치 빠른 엉클이 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극도의 예민한 반응을 나에게만 보이는 태도를 유심히 관찰하던 엉클은 분명히 어떤 의문을 어머니에게 품었다. 분명히 나 없는 사이에 추궁을 당했을 것이고 어머니는 죽어도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부인했을 것이다. 미운 사람을 더 놓치기 안타깝다. 그래서 영원한 사랑보다는 영원한 증오가 더 생명력이 강하다. 어머니는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자신에 대한 분노로 표출 되었을 것이다. 자식은 나 하나 뿐이 아니었다. 세 명의 틴에이저들이 있고 두 명의 초등학생이 있다. 어머니는 나만 생각하면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이글거리며 불타던 어머니의 눈빛과 의혹을 던지는 엉클의 파란색 눈이 무서웠다. 집에서는 극도로 위축되어 갔다.
나는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가 좋았다. 새벽에 집에서 빠져 나오면 내 표정은 밝게 빛났다. 특별히 사귀는 친구도 없었고 재미있는 일도 없었지만 항상 끼고 다니는 녹음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좋았고 질주하는 버스가 좋았다. 또한 학교생활도 원만했고 직장에 나가면 막내로 귀여움을 받으며 일해서 좋았다.
직장에서는 독일여자인 보스가 항상 활짝 웃으며 맞아주었다. 종업원은 저녁에 식당음식을 가져다 먹었다. 2달러 범위 내에서 먹을 수 있다는 내부규정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규정도 모르고 입맛 내키는 대로 이것저것을 자꾸 가져다 먹었다. 내가 일하는 코너의 한 구석에는 고급 아이스크림이 떨어질 때가 없었고, 여러 가지 신기한 음식을 눈치도 안 보고 오가며 마구 집어 먹었다. 입속에 한 움큼의 고기를 씹으며 일하는 나를 보고 보스는 팔을 허리에 살짝 올려붙이고는 파란 눈으로 웃기만 했다. 직장에서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우수개소리로 입에 올려졌으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행동하는 나에게 싫지만 않은 미소를 보내곤 했다. 이것은 한국인을 고용하면 일을 잘한다는 그 곳만의 전통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취업하기 전에도 한국인 여자가 무척 일을 잘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보고 선뜻 채용하겠다는 전화를 걸은 것이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보스가 손가락질만 하면 싱글싱글 웃으며 일에 매달렸다. 접시를 닦는 속도도 무척 빨랐다. 잠시 한가한 시간이면 커다란 방으로 되어있는 냉장실을 정리하고 큰 창고에 잔뜩 쌓인 물품정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일에 매달려서 시간을 끄는 일이 없었다. 그저 열심히 했고 사람들의 귀찮은 심부름도 씩씩하게 해 주었으니 막내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독일여자인 보스는 어머니와 몸매와 거의 닮았고 싱긋 웃을 때면 어머니의 화사한 모습과 비슷했다는 점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이유였다. 또한 내가 실수할 적마다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웃기만 했다는 고마움도 많이 작용했다.
주로 카운터를 보는 사십대 흑인여자인 수지는 무척 뚱뚱한 여자였다. 웃을 때만 드러나는 하얀 이빨, 그리고 음식을 먹을 적에 보이는 빨간 혓바닥은 내 눈을 둥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사방으로 흔들며 달려와서는 나를 와락 끌어안기도 했다. 커다란 유방을 나에게 밀착시키며 오우 마이달링, 아이 러브 유, 하고 장난을 걸었다. 나는 특유한 흑인냄새에 눈썹을 찡긋하며 “나도, me too.” 하고는 허우적거렸다. 그러면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종업원이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배꼽을 쥐고 웃었다. 내 생일을 기억해준 여자도 수지였다. 생일케익을 직접 만들어서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놓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생일축하노래를 선창했다.
그러나 나를 정확하게 알아본 사람은 미찌꼬라는 일본 여자였다. 삼십 중반의 그 여자는 미군병사하고 사는 여자였다. 피자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미찌꼬는 나에게 가끔 심부름도 시켰다. 항상 말이 없고 조용하게 일했지만 그 여자는 내가 어떤 위치에서 고통을 당하는지 확실하게 꿰뚫었다. 퇴근시간만 되면 흐려지는 내 표정에서 모든 것을 유추해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여자도 나 같은 삶을 살았던 여자였다. 어머니가 일본 패망 직후에 오키나와에서 미군병사와 재혼했으며 그 슬하에서 자랐다. 역시 미치광이의 길을 가 본 자만이 미치광이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일이 많아서 모두가 늦게 퇴근하던 날이었다. 밤 11시 30분이 넘은 시간에 나를 집까지 태워준다고 했다. 막차를 놓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야만 했던 나는 순순히 응했다. 미찌꼬는 차 안에서 나의 집안사정을 이것저것 캐물었다. 구구절절 내 입장을 이야기할 영어실력도 되지 않았기에 듬성듬성 묻는 말에 대답해 주었다. 미찌꼬는 내 사정을 다 안 들어도 환하게 알고 말했을 것이다. 혹시 집에서 나오게 되면 자기 집에 와서 살아도 된다고 했다. 집에는 15살 된 딸이 한 명뿐이 없기 때문에 빈 방도 있다고 하며 호의를 보였다.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에 환하게 불이 켜진 주방에 어머니가 혼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막차시간도 지났는데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나는 미찌꼬라는 여자가 태워주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무척 예민했다. 마치 질투하는 듯한 표정으로 차 안에서 무슨 말을 했냐고 또 물었다. 이 순간에는 거짓말을 했어야 했었다. 그러나 나는 고지식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혹시 집에서 나오게 되면 자기 집에 와서 살아도 좋다는 말을 했다는 대목에서 어머니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뭐라고? 그렇게 일본여자가 좋으면 나가서 같이 살아.”
낮지만 뜨거운 숨결을 띄고 날아온 그 말은 긴 칼날이 내 가슴을 푹 찌르는 것 같았다. 나는 온 몸이 얼어붙었다. 평소에 불길한 예감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집에서 쫓겨 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러면 아는 사람도 없는 이국땅에 그냥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글이글거리는 어머니의 눈동자와 얼어붙은 내 눈동자가 마주치며 불꽃을 튕겼다.
“이 집이 그렇게도 싫어? 네가 집을 나가면 무슨 살림을 사 줄까? 말해 봐.”
나는 어머니의 싸늘한 몇 마디 속에서 엉클과 어머니 사이에서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쉽사리 나가서 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내 거취에 대하여 서로가 다툼이 있었던 증거였다. 잠들었어야 할 이 시간까지 어머니가 주방에 홀로 앉아있었다는 것은 내가 들어서기 전에 엉클과 무슨 다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불길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엉클은 방에서 꼼짝도 안했다.
“이제 네가 돈을 좀 번다고 껍적거리는데 이 집이 싫으면 마음대로 해.”
나는 반항하고 싶었다. 그러나 반항할 수 있는 하등의 힘도 없었다. 문밖만 나서면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알콜중독자가 길거리에서 비틀거리고 대마초나 마약에 중독 된 사람들이 횡행한다. 히피들이 거리를 떠돌고 동성연애자들은 먹잇감을 구하려 눈에 불을 켜고 다닌다. 지금 걷고 있는 내 길에서 한발자국만 옆으로 삐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순간적으로 내 가슴 속에도 분노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말없이 굴복해야 한다는 수치심이 등줄기를 찌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잘못했다고 빌었다. 앞으로는 그런 말을 듣지도 않겠다고 말했다.
“그럴 정신이면 네 아비를 찾아보는 것이 어때? 지금 한국에서 잘 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비는 안 찾아 볼 거야?”
실로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미치광이처럼 서성거리고 있었다. 엉클에게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은폐시키고 싶었을 것이고, 이런 불행을 제공한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았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찾아보라는 말을 던졌다. 그 말은 이제 네 아비를 찾아서 여기를 떠나라는 말과 같았다.
마침 막내아이가 높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깨어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주방에 들어섰다. Mam, What's the matter?
무슨 일이냐고 투정어린 목소리로 어머니의 품에 뛰어드는 막내를 어머니는 끌어안았다.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고 말했다.
다리가 휘청했다. 현기증이 도는 머릿속에는 내가 광야에 던져진 느낌이었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진 채 사라질 수도 있다는 현실을 직감했다.
공포와 분노가 교차했다. 그리고 고독했다. 변함없이 잠을 깬 새벽 다섯 시 반은 나의 마지막 시간 같았고 베게에는 눈물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 날은 모처럼 장대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새벽 버스에 몸을 싣고 달리던 아스팔트에 포말이 날리고 있었다.
나는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가 좋았다. 새벽에 집에서 빠져 나오면 내 표정은 밝게 빛났다. 특별히 사귀는 친구도 없었고 재미있는 일도 없었지만 항상 끼고 다니는 녹음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좋았고 질주하는 버스가 좋았다. 또한 학교생활도 원만했고 직장에 나가면 막내로 귀여움을 받으며 일해서 좋았다.
직장에서는 독일여자인 보스가 항상 활짝 웃으며 맞아주었다. 종업원은 저녁에 식당음식을 가져다 먹었다. 2달러 범위 내에서 먹을 수 있다는 내부규정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규정도 모르고 입맛 내키는 대로 이것저것을 자꾸 가져다 먹었다. 내가 일하는 코너의 한 구석에는 고급 아이스크림이 떨어질 때가 없었고, 여러 가지 신기한 음식을 눈치도 안 보고 오가며 마구 집어 먹었다. 입속에 한 움큼의 고기를 씹으며 일하는 나를 보고 보스는 팔을 허리에 살짝 올려붙이고는 파란 눈으로 웃기만 했다. 직장에서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우수개소리로 입에 올려졌으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행동하는 나에게 싫지만 않은 미소를 보내곤 했다. 이것은 한국인을 고용하면 일을 잘한다는 그 곳만의 전통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취업하기 전에도 한국인 여자가 무척 일을 잘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보고 선뜻 채용하겠다는 전화를 걸은 것이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보스가 손가락질만 하면 싱글싱글 웃으며 일에 매달렸다. 접시를 닦는 속도도 무척 빨랐다. 잠시 한가한 시간이면 커다란 방으로 되어있는 냉장실을 정리하고 큰 창고에 잔뜩 쌓인 물품정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일에 매달려서 시간을 끄는 일이 없었다. 그저 열심히 했고 사람들의 귀찮은 심부름도 씩씩하게 해 주었으니 막내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독일여자인 보스는 어머니와 몸매와 거의 닮았고 싱긋 웃을 때면 어머니의 화사한 모습과 비슷했다는 점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이유였다. 또한 내가 실수할 적마다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웃기만 했다는 고마움도 많이 작용했다.
주로 카운터를 보는 사십대 흑인여자인 수지는 무척 뚱뚱한 여자였다. 웃을 때만 드러나는 하얀 이빨, 그리고 음식을 먹을 적에 보이는 빨간 혓바닥은 내 눈을 둥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사방으로 흔들며 달려와서는 나를 와락 끌어안기도 했다. 커다란 유방을 나에게 밀착시키며 오우 마이달링, 아이 러브 유, 하고 장난을 걸었다. 나는 특유한 흑인냄새에 눈썹을 찡긋하며 “나도, me too.” 하고는 허우적거렸다. 그러면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종업원이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배꼽을 쥐고 웃었다. 내 생일을 기억해준 여자도 수지였다. 생일케익을 직접 만들어서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놓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생일축하노래를 선창했다.
그러나 나를 정확하게 알아본 사람은 미찌꼬라는 일본 여자였다. 삼십 중반의 그 여자는 미군병사하고 사는 여자였다. 피자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미찌꼬는 나에게 가끔 심부름도 시켰다. 항상 말이 없고 조용하게 일했지만 그 여자는 내가 어떤 위치에서 고통을 당하는지 확실하게 꿰뚫었다. 퇴근시간만 되면 흐려지는 내 표정에서 모든 것을 유추해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여자도 나 같은 삶을 살았던 여자였다. 어머니가 일본 패망 직후에 오키나와에서 미군병사와 재혼했으며 그 슬하에서 자랐다. 역시 미치광이의 길을 가 본 자만이 미치광이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일이 많아서 모두가 늦게 퇴근하던 날이었다. 밤 11시 30분이 넘은 시간에 나를 집까지 태워준다고 했다. 막차를 놓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야만 했던 나는 순순히 응했다. 미찌꼬는 차 안에서 나의 집안사정을 이것저것 캐물었다. 구구절절 내 입장을 이야기할 영어실력도 되지 않았기에 듬성듬성 묻는 말에 대답해 주었다. 미찌꼬는 내 사정을 다 안 들어도 환하게 알고 말했을 것이다. 혹시 집에서 나오게 되면 자기 집에 와서 살아도 된다고 했다. 집에는 15살 된 딸이 한 명뿐이 없기 때문에 빈 방도 있다고 하며 호의를 보였다.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에 환하게 불이 켜진 주방에 어머니가 혼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막차시간도 지났는데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나는 미찌꼬라는 여자가 태워주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무척 예민했다. 마치 질투하는 듯한 표정으로 차 안에서 무슨 말을 했냐고 또 물었다. 이 순간에는 거짓말을 했어야 했었다. 그러나 나는 고지식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혹시 집에서 나오게 되면 자기 집에 와서 살아도 좋다는 말을 했다는 대목에서 어머니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뭐라고? 그렇게 일본여자가 좋으면 나가서 같이 살아.”
낮지만 뜨거운 숨결을 띄고 날아온 그 말은 긴 칼날이 내 가슴을 푹 찌르는 것 같았다. 나는 온 몸이 얼어붙었다. 평소에 불길한 예감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집에서 쫓겨 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러면 아는 사람도 없는 이국땅에 그냥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글이글거리는 어머니의 눈동자와 얼어붙은 내 눈동자가 마주치며 불꽃을 튕겼다.
“이 집이 그렇게도 싫어? 네가 집을 나가면 무슨 살림을 사 줄까? 말해 봐.”
나는 어머니의 싸늘한 몇 마디 속에서 엉클과 어머니 사이에서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쉽사리 나가서 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내 거취에 대하여 서로가 다툼이 있었던 증거였다. 잠들었어야 할 이 시간까지 어머니가 주방에 홀로 앉아있었다는 것은 내가 들어서기 전에 엉클과 무슨 다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불길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엉클은 방에서 꼼짝도 안했다.
“이제 네가 돈을 좀 번다고 껍적거리는데 이 집이 싫으면 마음대로 해.”
나는 반항하고 싶었다. 그러나 반항할 수 있는 하등의 힘도 없었다. 문밖만 나서면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알콜중독자가 길거리에서 비틀거리고 대마초나 마약에 중독 된 사람들이 횡행한다. 히피들이 거리를 떠돌고 동성연애자들은 먹잇감을 구하려 눈에 불을 켜고 다닌다. 지금 걷고 있는 내 길에서 한발자국만 옆으로 삐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순간적으로 내 가슴 속에도 분노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말없이 굴복해야 한다는 수치심이 등줄기를 찌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잘못했다고 빌었다. 앞으로는 그런 말을 듣지도 않겠다고 말했다.
“그럴 정신이면 네 아비를 찾아보는 것이 어때? 지금 한국에서 잘 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비는 안 찾아 볼 거야?”
실로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미치광이처럼 서성거리고 있었다. 엉클에게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은폐시키고 싶었을 것이고, 이런 불행을 제공한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았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찾아보라는 말을 던졌다. 그 말은 이제 네 아비를 찾아서 여기를 떠나라는 말과 같았다.
마침 막내아이가 높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깨어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주방에 들어섰다. Mam, What's the matter?
무슨 일이냐고 투정어린 목소리로 어머니의 품에 뛰어드는 막내를 어머니는 끌어안았다.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고 말했다.
다리가 휘청했다. 현기증이 도는 머릿속에는 내가 광야에 던져진 느낌이었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진 채 사라질 수도 있다는 현실을 직감했다.
공포와 분노가 교차했다. 그리고 고독했다. 변함없이 잠을 깬 새벽 다섯 시 반은 나의 마지막 시간 같았고 베게에는 눈물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 날은 모처럼 장대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새벽 버스에 몸을 싣고 달리던 아스팔트에 포말이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