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교생활에도 충실했으며 직장에서도 호평을 받은 편이었다. 일하는 손도 빨라지고 일터의 사람들과도 잘 사귀었다. 보스는 내 능력을 믿었는지 접시 닦는 일을 맡겼다. 냄비는 떨어뜨리거나 마구 다루어도 깨질 염려가 없었지만 접시는 조심성을 요했다. 또한 접시 닦는 기계를 잘 다루어야 했기 때문에 그 일을 맡긴다는 자체가 신임의 표시였다. 접시의 종류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수량도 방대했다. 음식물이 잔뜩 묻어 들어온 접시를 아홉 개씩 새워서 기계에 넣어야 했다. 손바닥을 펴서 쌓여있는 접시를 탁 잡으면 정확하게 아홉 개씩 잡혔으니, 집중의 묘미를 알 수 있었다.
미국독립기념일은 내가 쉬는 날이었다. 그러나 출근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가서 일했다. 자신이 쉬는 날에 특근을 하면 두 배로 임금을 지급했으니 마다할 일은 없었다. 식당에는 하루 종일 사람들이 끓었다. 접시를 닦아서 지정된 장소에 쌓아놓기 무섭게 바닥이 났다. 또 한쪽에서는 걷어 들인 접시가 산처럼 쌓였다. 원래는 둘이서 해야 할 일인데, 출근하기로 한 사람이 안 나오는 바람에 내가 혼자서 도맡았다. 뜨거운 김이 퍽퍽 솟는 기계 옆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접시를 닦았다.
온 몸에 빨간 캐찹을 묻혀가면서 일하다가 자꾸 코밑이 간지러웠다. 무심결에 손으로 코밑을 문지르니 빨간 액체가 묻어나왔다. 나는 캐찹으로 알고 간지러우면 팔뚝으로 쓱쓱 문질렀다. 보스가 곁을 지나가다 내 얼굴을 보고는 소리쳤다. 코피가 쏟아졌지만 그것도 모르고 온통 얼굴에는 피범벅을 하고 있던 나를 본 것이었다. 보스는 휴게실로 끌고 가서 나를 눕히더니 얼음을 싼 수건으로 내 이마를 문질러 주었다. 순간적으로 외로움이 엄습하였다.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이국땅에서 코피를 흘리고 있다니, 감은 눈 속으로는 고향땅의 나비가 날고 있었다. 못 살아도 좋으니 게으름이라도 피며 다정한 사람과 함께 살고 싶었다. 잠시 후에 피가 멎자 접시를 닦으러 갔다. 아무도 내 일을 대신해 준 사람은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는 모두가 나 혼자서 처리할 몫으로 남겨져 있었으니, 실로 참담한 심정뿐이었다.
저녁에는 일하고 낮에는 공부하여 성공한 유학생의 말은 거의가 거짓말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한가한 나라가 아니다. 대학교 등록금은 엄청 비싸고 공부의 강도도 무척 세다. 미국학생은 체력이 동양인보다 월등히 좋기 때문에 이틀은 끄덕 없이 밤을 새우며 공부할 수 있지만, 동양인은 하룻밤만 새워도 다음날은 몸을 주체하지 못한다. 더구나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공부를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메리칸드림은 미국인이 만든 자화자찬식의 허구일지도 모른다. 가끔 그런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에서 출세하는 놈은 한국에서도 출세한다고 한인교포들은 자조 섞인 말을 흔히 한다. 더구나 상류사회로 올라가면 그들만의 텃세와 편견 때문에 더욱 아메리칸드림은 멀어져 간다.
South Korea or North Korea?
미국학교생활에서 내가 받는 첫 질문이었으며 무척 황당한 질문이었다. 남한에서 왔는가, 아니면 북한에서 왔는가하는 질문은 반공정신 일색이었던 그 시절에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마침 KAL기 납북사건이 미국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한반도에 금방 전쟁이라도 터질 듯 교포사회는 술렁댔다. 그 당시에 내 자존심을 마구 건들인 것은 바로 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의식이었다. 미개하고 못사는 나라의 역사는 초라했다. 내가 신봉하던 한국역사는 미국에서 얼굴도 못 내밀었다. Best America, 미국은 좋은 나라 정도가 아니라 세계에서 최고의 나라였다.
반만년 한반도의 역사가 몇 백 년뿐이 안 되는 미국역사에 밀렸다. 왜소한 체구로 이민 온 한국인들은 먼 아프리카의 원주민처럼 여겨졌다. 한인교포사회도 사분오열의 현상을 보였으며, 한국의 재벌과 장관의 아들이 소공자의 폼으로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돈과 염문을 뿌렸다.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이미 차이나타운과 재팬니스타운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코리안타운은 없었다. 한국에서 돈 푼께나 챙겨서 이민 온 사람과 그렁저렁 알몸으로 건너온 사람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패어있었다. 나는 주변에 아무것도 내 세울 것이 없었다. 내 자존심을 뒷받침할 만한 역사도 없었고 가문도 없었다. 어머니도 역시 한인사회에서는 양공주라고 불리고 있었다. 나는 대마초에 취하여 금문공원(Golden Gate Park)을 어슬렁대는 부랑아도 아니었으며 소공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같은 핏줄이라고 성큼 한인교회에 발을 들여놓기도 어정쩡했다.
어느 날, 마크라는 백인학생이 나를 조용히 불러내었다. 뒤를 따라가니 덩치가 큰 흑인학생 서너 명이 나를 빙 둘러쌓았다. 한국인은 태권도를 잘 한다고 그러니 같이 한판 붙어보자는 호기였다. 실로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비쩍 마른 체구에 힘도 없어 보인 나였지만 그 당시에 태권도 초단의 실력이었다. 그것도 태권도 선수들만 수련하는 도장에서 얻어터져 가면서 배웠으니 내 발길질은 아주 빠르고 힘찼었다. 그들은 빈정거리며 약을 살살 올리더니 커다란 주먹을 불끈 내 얼굴에 갖다대곤 했다. 사실 무척 겁이 났었다. 우선 불쑥불쑥 솟아나온 그들의 근육에 질려버렸다. 그러나 비실비실 물러난다면 한국인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마지못해 O.K. 사인을 보냈다. 환호하며 제일 사납게 생긴 흑인이 주먹을 쥐고 내 앞에 서자마자 한방 날렸다. 선방을 맞은 것이었다. 아찔하며 눈에 별이 빛나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태극기를 생각했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추스르며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검은 덩치가 밀려오는 순간에 내 발길질이 그의 옆구리에 꽂혔다. “아웃치”하면서 그 흑인이 나가 떨어지자 빙 둘러 쌓았던 다른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용쟁호투 같은 장면을 목격한 아이는 일본학생인 다나까였다. 그는 학교에서 가라테를 잘한다고 정평이 나 있던 아이였다. 같은 동양인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을 구하려고 뛰어든 그를 보고 흑인들은 비실비실 물러났다. 다나까는 평소에 타자를 같이 배우던 학생이었다. 한국을 침략했던 일본인 자손이었지만 이상하게 중국학생보다는 일본학생이 더욱 친밀하게 느껴졌던 기억이다. 그것은 문화적인 동질감이 중국인 보다는 일본인이 더 많지 않았나하는 판단이다. 더구나 다나까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에 한국에서 교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학교에 찾아와서는 유창한 한국말로 다나까를 잘 부탁한다고 나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애국자 아닌 교포는 없다. 초라한 조국의 실상에 직접적으로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바로 외국에서 사는 교포들이었다. 조국을 조국에서 배우면 아무것도 모른다. 나라 밖으로 나가서 호된 비평과 함께 객관적으로 조국을 배워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고, 자연스럽게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배운 것은 실용주의생활관이었다.
마약과 알콜, 그리고 섹스가 난무하는 미국이 지금도 견고하게 성장할 수 있는 보편적인 힘은 어디에 있는가, 망한 집안은 망한 이유가 있고 흥한 집안은 흥한 이유가 있다. 역사가 짧은 미국이 베스트아메리카로 일어선 그 힘은 바로 실용주의 때문이었다. 어려운 철학도 아니고 교과서가 필요한 교육도 아니었다.
“영어는 손짓 발짓으로 배워야 돼.”
이 말에 이국땅에서 어머니를 지탱해 온 인생관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이 말을 곧잘 던졌다. 영어는 책으로 배우면 실패한다. 오직 눈치로 배워야 한다. 유창한 미국인의 영어에 주눅이 들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는 것이다. 어머니는 대단한 실용주의신봉자였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중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 아이를 첫 눈에 구분할 수 있으며, 같은 미국인이라도 잉글랜드계, 독일계, 불란서계통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으면 어느 정도 미국생활에 적응되어가는 증거다. 영어를 세심하게 따져서 들을 필요도 없이 한 두 마디의 아는 단어로 상대방의 뜻을 때려잡으면 영어가 늘기 시작하는 것이다. 눈치는 저절로 빨라지게 마련이다. 높게만 보였던 미국인도 사람이고 이민자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존웨인과 쌍권총을 서로 뽑는 형태로 맞서야 생존할 수 있는 미국이다. 더듬거리는 내 영어에 확신이 들기 시작했고 직장에서는 확실한 근로자로 인정받게 된 배경에는 어머니의 실용주의생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워하며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어머니가 밉기도 했다. 그래서 닮아갔다. 또한 사랑도 했다. 그래서 닮지 않으려 애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