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는 나까지 포함하여 다섯 명의 한국남학생이 있었다. 서로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왔고 나이도 비슷했다. 그 중에서 한 명은 박정희정권을 피하여 이민 온 한국장성의 아들이었고, 또 한 명은 뉴욕에서 근무하는 의사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차이나타운에 있던 한인교회에 나갔지만 나머지는 내세울 것도 없는 집안이라서 교회에 나가지도 않았다. 나도 교회에 가 보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한인들끼리의 장막이 가려져 있었다. 돈 많고 유력한 집안끼리 모인 곳이 바로 한인교회 같았다. 더구나 나는 그들이 말하는 양공주의 아들이었다. 학교에서는 서로가 농구도 하며 몰려다녔지만 그 이외의 교류는 별로 없었다. 또한 각자의 집안에서는 그 당시에 샌프란시스코에 만연되었던 히피족과 대마초 때문에 자식 단속을 엄하게 했다.
한국학생 중에서 나 혼자서만 유일하게 돈을 벌었다. 한 달에 250달러 이상을 버는 내 주머니는 항상 두둑했다. 집에 80달러를 내놓아도 거의 200달러 가까이 남아돌았다. 라디오가 부착된 Sony사의 녹음기를 사가지고 다녔다. 음악을 듣다가 좋은 음악이 나오면 얼른 녹음을 하여 다시 듣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으며 고독한 이방인의 낙이었다. 사이먼 앤 가팡클, 린 앤더슨, 린다 론스타트, 닐 다이어먼드, CCR, 등의 노래는 가슴을 파고들었다. 같은 친구끼리도 서로의 입장이 달랐기에 나는 별로 친구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딱 한 명의 친구에게만 정을 느꼈었다.
정호라는 친구는 다른 학교에 다니는 내 또래였다. 다운타운에 있는 백화점의 오층에서 알게 된 그는 한 눈에도 그늘져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주일에 오일만 일하기 때문에 월요일과 화요일은 쉬었다. 버스티겟을 파는 곳에서 만난 그는 나하고 의기가 상통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잘난 척하지도 않았으며 말도 차분하게 했다.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서 차이나타운에 산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참으로 부러운 말이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전기기타를 잘 친다고 자기자랑을 하던 그는 어머니가 사 준 전기기타가 집에 있는데 자기의 솜씨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다음주에 그의 집에 놀러갔다. 빈민들이 사는 아파트의 이층에 올라가자 방 두개에 목욕탕 하나, 그리고 조그만 주방과 거실이 붙어있는 아담한 곳이었다. 그는 자기 방에 나를 데려가더니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잘 치는 솜씨였다. The house of Rising Sun.이라는 벤쵸스악단의 연주를 그대로 흉내 내었다. 한참 기타연주에 몰두하고 있는데 아파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하고 같이 있는 모양이지? 그냥 놀고 있거라.”
친구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방문은 위쪽에 우유빛 유리가 끼어져 있어서 밖에서 들어오는 그림자가 비쳤다.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작은 키의 그림자가 유리문에 스쳤다. 그리고 뒤따라 키가 큰 남자의 그림자가 언뜻 비치며 앞선 그림자를 쫓아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힐끔 방문 쪽을 바라보던 정호의 손가락이 기타 위에서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나는 그 당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차이나타운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창녀였던 것이다.
정호엄마는 무척 정호를 아꼈다. 흡사 창녀짓을 하는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듯 정호가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려고 노력했으며, 한번은 차이나타운에서 유명하다는 음식점에 나까지 데려 가서 푸짐하게 저녁대접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정호엄마와 음식점에 가기 전에 이미 정호엄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한인교회에 다니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교인들이 모두 정호엄마를 손가락질 한다고 했다. 교회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몸을 파는 여자라고 모두가 밉게 보고 있었다. 당연히 정호도 한인들에게 따돌림 당하게 되었으며, 학교도 한국학생이 없는 다른 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정호에게는 항상 따듯한 어머니였다. 식사를 끝내고 정호엄마는 정호의 어깨를 팔로 포근히 감싸 안은 채 어두운 차이나타운으로 사라졌다.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 걷는 어머니......
항상 시선을 아래로 깔고 침묵하는 나였지만 어느새 나는 어머니를 너무도 잘 읽고 있었다. 팔로 어깨를 감싸는 다정함보다도 어머니는 더욱 포근하게, 그것도 저 멀리서 감싸 안을 줄 알았다. 이른 새벽에 냄비를 열면 빨간색의 김치찌개가 고향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마늘과 김치냄새에 질색하는 엉클과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주방의 창문을 몽땅 열어놓고 만든 음식이었다. 일본상표가 붙은 김이 있고 밥은 따듯한 전기밥솥에서 김을 무럭무럭 내고 있었다. 단 둘이서 식료품점으로 쇼핑을 나가면 식구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다 산 후에는 내가 먹을 수 있는 한국식품 비슷한 것을 사려고 커다란 매장을 몇 바퀴씩 돌았다.
“이것은 미국오이인데 너무 달짝지근해서 맛이 별로야.”
어머니는 쌀쌀맞게 던지는 말 속에 무척 따듯한 가슴을 넣는 기술을 가졌으며 멀리서도 포근한 품을 던지는 마술도 부릴 줄도 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것은 다섯 아이들을 키우는 힘겨움 속에서 터득한 비법인 줄도 몰랐다. 나까지 합하면 자식이 여섯 명이다. 어찌 일일이 감싸 안고 도닥거릴 수 있겠는가,
“이 잠바를 한번 입어 봐.”
남성의류 매장에서 어머니는 얇은 잠바를 꺼내어 내밀었다. 에메랄드빛 천에 하얀색으로 장식된 자크가 주머니마다 달려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키가 훌쩍 자란 내가 잠바를 입은 모습을 눈부신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어머니와 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어머니의 시선은 내 시선을 슬쩍슬쩍 피하며 위아래를 훑었다. 살짝 웃음을 띤 어머니는 이 잠바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며 얼른 돌아섰다. 그 때에 어머니는 당황하고 있었던 것일까, 다 자란 자식이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을까, 너무도 내가 눈부시게 보여서 돌아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눈부신 존재였다.
사십이 넘은 나이지만 얼굴은 팽팽했고 몸매도 적당히 날씬했다. 단아한 몸매에 빨간색 줄무늬가 쳐진 정장을 하고서 파란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서 있었다. 하얀색 자동차를 올라탈 적에는 고귀한 품격마저 엿보였다.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만 보아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어머니는 찬란한 빛을 발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각인되었다. 쌀쌀맞게 던지는 말, 휙 돌아서는 발길, 그 이면에는 가슴을 울리는 따듯함과 포근함이 눈물의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사이에서는 남편인 엉클과 다섯 아이들이 느낄 수 없는 나만의 느낌이 따로 있었다. 흡사 호랑이처럼 아이들을 다루는 어머니 행동의 이면에는 삶의 피곤함이 심신에 베어 있었고, 그 피곤함을 나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십오 년 이상을 외국인과 살아오면서 이질적인 민족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결혼생활의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가끔 어머니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사십이 넘으니깐 남편에게서 나는 냄새가 무척 역겨워진다고 말했다. 사실 어머니는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은 가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물릴 수도 없는 인생 앞에는 다섯 아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뒷걸음질치는 자신의 뒤에서 고향을 느낄 수 있는 내가 버텨주기를 바랬는지도 몰랐다. 그 당시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우둔함은 지금도 내 가슴의 한으로 남아있다. 어머니는 나에게 빌고 있었다. 매정한 태도 뒤에는 눈물로 나에게 용서를 구하며 의지하려는 나약함이 있었다.
어려운 살림을 참지 못하고 시집을 박차고 나와 외할머니에게 나를 맡기고 훌쩍 외국으로 떠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으며, 아비도 돌보지 않는 자식이 친척들 틈에서 천덕꾸러기로 떠돌아야만 한다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가끔 남편 몰래 한국으로 돈을 보내기도 했지만 낮선 외국 땅에서도 내가 우는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산아제한을 못하게 하는 미국의 법에 따라서 줄줄이 아기를 낳게 되었으니 누구는 자식이고 누구는 자식이 아닌가, 모두가 연약한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다섯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수당이 많이 붙은 외국근무를 자청하는 남편을 따라서 유랑민처럼 일본이나 독일 등지를 떠돌아 다녔다. 그렇게 십오 년 이상을 지나면서 어머니의 심신은 피폐되고 찌들어갔다. 고향이 무척 그리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고향을 기대했고 위로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나이가 18살이 넘은 자식이란 어머니를 감싸 안을 줄 알아야했다. 모자지간의 정보다는 인생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도 인간이고 허약한 존재다. 끝까지 우뚝 서서 견고함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누구든지 오랜 시달림을 받으면 나약해지고 피폐되어 간다. 삶의 끝마무리는 항상 누구에게든지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뿐이다.
“너는 학교나 일터에서도 그렇게 무뚝뚝하게 말이 없니?”
차를 몰고 가며 어머니가 던진 쌀쌀한 목소리였다. 나는 침묵했다.
“미국은 한국하고 달라. 여기는 점잖고 말없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본단 말이야. 음흉한 동양인으로 생각하거든. 앞으로는 제발 말도 많이 하고 좀 활발하게 미국 애들처럼 놀아라.”
어머니는 자기를 사랑해달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목소리 뒤에는 자기를 진정한 어머니로 인정해 달라는 호소가 있었다. 그것을 삼십 년이 지난 후에나 깨달은 자식이었으니......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이다.
한국학생 중에서 나 혼자서만 유일하게 돈을 벌었다. 한 달에 250달러 이상을 버는 내 주머니는 항상 두둑했다. 집에 80달러를 내놓아도 거의 200달러 가까이 남아돌았다. 라디오가 부착된 Sony사의 녹음기를 사가지고 다녔다. 음악을 듣다가 좋은 음악이 나오면 얼른 녹음을 하여 다시 듣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으며 고독한 이방인의 낙이었다. 사이먼 앤 가팡클, 린 앤더슨, 린다 론스타트, 닐 다이어먼드, CCR, 등의 노래는 가슴을 파고들었다. 같은 친구끼리도 서로의 입장이 달랐기에 나는 별로 친구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딱 한 명의 친구에게만 정을 느꼈었다.
정호라는 친구는 다른 학교에 다니는 내 또래였다. 다운타운에 있는 백화점의 오층에서 알게 된 그는 한 눈에도 그늘져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주일에 오일만 일하기 때문에 월요일과 화요일은 쉬었다. 버스티겟을 파는 곳에서 만난 그는 나하고 의기가 상통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잘난 척하지도 않았으며 말도 차분하게 했다.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서 차이나타운에 산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참으로 부러운 말이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전기기타를 잘 친다고 자기자랑을 하던 그는 어머니가 사 준 전기기타가 집에 있는데 자기의 솜씨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다음주에 그의 집에 놀러갔다. 빈민들이 사는 아파트의 이층에 올라가자 방 두개에 목욕탕 하나, 그리고 조그만 주방과 거실이 붙어있는 아담한 곳이었다. 그는 자기 방에 나를 데려가더니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잘 치는 솜씨였다. The house of Rising Sun.이라는 벤쵸스악단의 연주를 그대로 흉내 내었다. 한참 기타연주에 몰두하고 있는데 아파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하고 같이 있는 모양이지? 그냥 놀고 있거라.”
친구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방문은 위쪽에 우유빛 유리가 끼어져 있어서 밖에서 들어오는 그림자가 비쳤다.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작은 키의 그림자가 유리문에 스쳤다. 그리고 뒤따라 키가 큰 남자의 그림자가 언뜻 비치며 앞선 그림자를 쫓아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힐끔 방문 쪽을 바라보던 정호의 손가락이 기타 위에서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나는 그 당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차이나타운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창녀였던 것이다.
정호엄마는 무척 정호를 아꼈다. 흡사 창녀짓을 하는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듯 정호가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려고 노력했으며, 한번은 차이나타운에서 유명하다는 음식점에 나까지 데려 가서 푸짐하게 저녁대접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정호엄마와 음식점에 가기 전에 이미 정호엄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한인교회에 다니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교인들이 모두 정호엄마를 손가락질 한다고 했다. 교회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몸을 파는 여자라고 모두가 밉게 보고 있었다. 당연히 정호도 한인들에게 따돌림 당하게 되었으며, 학교도 한국학생이 없는 다른 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정호에게는 항상 따듯한 어머니였다. 식사를 끝내고 정호엄마는 정호의 어깨를 팔로 포근히 감싸 안은 채 어두운 차이나타운으로 사라졌다.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 걷는 어머니......
항상 시선을 아래로 깔고 침묵하는 나였지만 어느새 나는 어머니를 너무도 잘 읽고 있었다. 팔로 어깨를 감싸는 다정함보다도 어머니는 더욱 포근하게, 그것도 저 멀리서 감싸 안을 줄 알았다. 이른 새벽에 냄비를 열면 빨간색의 김치찌개가 고향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마늘과 김치냄새에 질색하는 엉클과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주방의 창문을 몽땅 열어놓고 만든 음식이었다. 일본상표가 붙은 김이 있고 밥은 따듯한 전기밥솥에서 김을 무럭무럭 내고 있었다. 단 둘이서 식료품점으로 쇼핑을 나가면 식구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다 산 후에는 내가 먹을 수 있는 한국식품 비슷한 것을 사려고 커다란 매장을 몇 바퀴씩 돌았다.
“이것은 미국오이인데 너무 달짝지근해서 맛이 별로야.”
어머니는 쌀쌀맞게 던지는 말 속에 무척 따듯한 가슴을 넣는 기술을 가졌으며 멀리서도 포근한 품을 던지는 마술도 부릴 줄도 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것은 다섯 아이들을 키우는 힘겨움 속에서 터득한 비법인 줄도 몰랐다. 나까지 합하면 자식이 여섯 명이다. 어찌 일일이 감싸 안고 도닥거릴 수 있겠는가,
“이 잠바를 한번 입어 봐.”
남성의류 매장에서 어머니는 얇은 잠바를 꺼내어 내밀었다. 에메랄드빛 천에 하얀색으로 장식된 자크가 주머니마다 달려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키가 훌쩍 자란 내가 잠바를 입은 모습을 눈부신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어머니와 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어머니의 시선은 내 시선을 슬쩍슬쩍 피하며 위아래를 훑었다. 살짝 웃음을 띤 어머니는 이 잠바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며 얼른 돌아섰다. 그 때에 어머니는 당황하고 있었던 것일까, 다 자란 자식이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을까, 너무도 내가 눈부시게 보여서 돌아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눈부신 존재였다.
사십이 넘은 나이지만 얼굴은 팽팽했고 몸매도 적당히 날씬했다. 단아한 몸매에 빨간색 줄무늬가 쳐진 정장을 하고서 파란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서 있었다. 하얀색 자동차를 올라탈 적에는 고귀한 품격마저 엿보였다.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만 보아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어머니는 찬란한 빛을 발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각인되었다. 쌀쌀맞게 던지는 말, 휙 돌아서는 발길, 그 이면에는 가슴을 울리는 따듯함과 포근함이 눈물의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사이에서는 남편인 엉클과 다섯 아이들이 느낄 수 없는 나만의 느낌이 따로 있었다. 흡사 호랑이처럼 아이들을 다루는 어머니 행동의 이면에는 삶의 피곤함이 심신에 베어 있었고, 그 피곤함을 나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십오 년 이상을 외국인과 살아오면서 이질적인 민족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결혼생활의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가끔 어머니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사십이 넘으니깐 남편에게서 나는 냄새가 무척 역겨워진다고 말했다. 사실 어머니는 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은 가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물릴 수도 없는 인생 앞에는 다섯 아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뒷걸음질치는 자신의 뒤에서 고향을 느낄 수 있는 내가 버텨주기를 바랬는지도 몰랐다. 그 당시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우둔함은 지금도 내 가슴의 한으로 남아있다. 어머니는 나에게 빌고 있었다. 매정한 태도 뒤에는 눈물로 나에게 용서를 구하며 의지하려는 나약함이 있었다.
어려운 살림을 참지 못하고 시집을 박차고 나와 외할머니에게 나를 맡기고 훌쩍 외국으로 떠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으며, 아비도 돌보지 않는 자식이 친척들 틈에서 천덕꾸러기로 떠돌아야만 한다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가끔 남편 몰래 한국으로 돈을 보내기도 했지만 낮선 외국 땅에서도 내가 우는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산아제한을 못하게 하는 미국의 법에 따라서 줄줄이 아기를 낳게 되었으니 누구는 자식이고 누구는 자식이 아닌가, 모두가 연약한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다섯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수당이 많이 붙은 외국근무를 자청하는 남편을 따라서 유랑민처럼 일본이나 독일 등지를 떠돌아 다녔다. 그렇게 십오 년 이상을 지나면서 어머니의 심신은 피폐되고 찌들어갔다. 고향이 무척 그리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고향을 기대했고 위로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나이가 18살이 넘은 자식이란 어머니를 감싸 안을 줄 알아야했다. 모자지간의 정보다는 인생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도 인간이고 허약한 존재다. 끝까지 우뚝 서서 견고함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누구든지 오랜 시달림을 받으면 나약해지고 피폐되어 간다. 삶의 끝마무리는 항상 누구에게든지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뿐이다.
“너는 학교나 일터에서도 그렇게 무뚝뚝하게 말이 없니?”
차를 몰고 가며 어머니가 던진 쌀쌀한 목소리였다. 나는 침묵했다.
“미국은 한국하고 달라. 여기는 점잖고 말없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본단 말이야. 음흉한 동양인으로 생각하거든. 앞으로는 제발 말도 많이 하고 좀 활발하게 미국 애들처럼 놀아라.”
어머니는 자기를 사랑해달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목소리 뒤에는 자기를 진정한 어머니로 인정해 달라는 호소가 있었다. 그것을 삼십 년이 지난 후에나 깨달은 자식이었으니......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