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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대부고 21회 동기회 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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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편입시험을 보았다.  영어는 말하기 보다는 듣기를 잘해야 했다.  그러나 미세한 음으로 처리되는 것까지 다 알아들으려면 거의 이년은 걸린다.  영어회화를 못하지만 영어로 써진 시험문제는 알아 볼 수 있었던 덕분에 무난히 시험에 통과했다.  미국고등학교 학과수준은 한국에 비하면 무척 낮아 보였다.  특히 수학이나 과학에 있어서는 더 그랬다.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미국역사시험이었지만 관대한 학교당국의 처분으로 편입이 허락되었다.  미국고등학교 생활은 글자 그대로 또 하나의 문화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내 성격이 밝아진 계기도 되었다.

나는 미국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절대로 때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짓궂은 행동을 일삼는 문제학생에게도 선생님은 대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정 말썽을 피우면 경찰에 연락했다.  나는 학교생활에 있어서는 천국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유로운 복장과 학교도서관에서 한 푼도 안받고 내주는 교과서, 또한 각종 잡부금도 일체 거두지 않았다.  점심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풍성한 메뉴로 배불렀다.  이곳에서 나는 한국의 학교와 교사들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았다.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벌을 서게 하고, 각종 잡부금에 시달리게 하며,  획일적으로 입히는 교복과 군대식으로 줄을 서게 하는 여러 가지 행사,  긴 매를 들고 다니며 사랑의 매라는 미명으로 마구 학생을 구타하는 한국교육 현주소를 깨달았다.  친부모가 없는 지경에서 등록금이나 잡부금을 마음 놓고 달랠 사람이 없었던 내가 얼마나 힘들게 학교생활을 했는가를 깨달았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인 미국학교는 실용적인 교육으로 일관했다.  모두가 쉽게 배울 수 있는 수준이고, 실생활에 꼭 필요한 교육이었다.  수영은 필수과목이었다.  누구든지 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하려는 배려로 보였다.  내가 선택과목으로 배운 타자는 삼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그 당시에 손가락마다 배당된 알파벳을 자판을 보지 않고 쳤기 때문에 한글도 자판을 안 보고 치는 것에 금방 숙달되었다.  그래서 한글타자실력도 만만치 않게 유지될 수 있었다.  수영법과 타자치는 실력은 미국에서 받은 평생 선물이라는 생각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숨통이 트였다.  아침 아홉시에 수업이 시작되지만 나는 이수할 과목이 많아서 여덟시에 등교하여 보충수업을 받았다.  집에서 새벽 다섯 시 반이면 일어났다.  누가 잠에서 깰까봐 까치발로 주방에 들어서서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가끔 전기밥솥에 밥을 해 두었다.  어떤 때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김치가 그 옆에 놓여있기도 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이면 밥솥 옆에는 내가 일주일 동안 쓸 용돈을 놓았다.  일주일에 오 달라 씩 주었다.  꼬깃하게 놓여있는 파란 지폐는 어머니의 따듯한 손길 같았다.  나는 월요일 아침마다 일주일 동안 쌓였던 어머니의 섭섭함과 화해했다.  지폐를 주머니에 넣으며 애틋한 모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섯시면 집을 나섰다.  언덕을 내려오며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 금문교의 난간은 빨간색으로 뻗어있고 그 아래는 안개가 흘렀다.  여섯 시 십 분에 출발하는 버스에 오르면 미국여학생 두 명이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곤 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동양인이라곤 나 하나 뿐이 없었기에 더욱 호기심과 경멸어린 눈초리로 보았다.  아침을 가르는 버스는 신선함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집에서 탈출했고, 저녁에는 그 곳으로 끌려들어가야 했다.  아침이면 밝았던 표정은 점심때가 지나서부터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서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섯 명의 극성스런 아이들과 어머니가 지르는 큰 목소리, 엉클의 커다란 덩치와 파란 눈, 더구나 나하고 같이 잠을 자는 9살 자리 동생은 형제 중에서 제일 극성맞았다.  나를 놀려대기 시작했고 졸졸 따라다니며 시비를 걸기 일쑤였다.  

어느 날, 너무 귀찮게 놀려대는 동생을 참다못해 발로 한대 찬 적이 있었다.  내 발길질에 바닥에 나가떨어진 그는 다른 형제들에게 뛰어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다섯 명의 형제들에게 둘러싸였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욕설을 들었다.  그날 밤에는 엉클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어머니와 나란히 앉은 엉클은 영어로 나를 타일렀다.  물론 어머니가 그 옆에서 한국말로 통역하며 그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전달하는 뜻에는 엉클이 말하는 것 이상의 울분이 섞여 있었다.  차분히 말하는 엉클에 비하여 어머니는 격앙된 목소리였고 눈빛은 이글거렸다.  내가 9살 된 동생을 발로 찬 이유는 묻지 않았으며 변명할 기회도 안 주었다.  미개한 나라에서 온 미개한 소년의 미개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분노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 행동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나의 출생에 대한 분노였다.  낳지 말아야 할 자식을 낳았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분노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손등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부터 어머니 앞에서 내가 얼마나 모호한 위치에 서 있는가를 똑똑히 기억했다.  외로움과 고독이 엄습했다.  자신의 출생을 저주해야만 하는 운명은 소년의 가슴 속에 깊이 박혔다.  다섯 형제들의 틈을 지나며 눈물을 훔쳤다.  

얼마 후에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저녁에 파트타임 일을 하러 나오라는 전화였다.  나는 운 좋게도 미군기지에서 운영하는 캐프테어리어라는 커다란 자율식당에 취직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한 시간에 1달러 50센트 정도의 임금을 받았지만 이 곳은 군인가족들만 취업시켰기 때문에 2달러 25센트라는 높은 임금을 주었다.  집에서 도피할 수 있는 장소가 또 생긴 것이다.  오후 3시 15분에 하교하면 집에 4시 10분에 들어가야 했지만, 앞으로는 밤 10시 30분까지 직장에서 일하다 들어가게 되어서 좋았다.  저녁을 가족끼리 안 먹으니 편했다.  또한 학교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 중에서 토요일은 8시간을 일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집안과 멀어질 수 있는 기회였다.  

독일여자인 보스는 삐쩍 마른 동양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검은머리와 검은 눈동자라는 자체가 손님들에게는 부담이 될 것 같았다.  될 수 있으면 손님들의 눈에 안 띄는 곳에 나를 배치해야 했다.  첫 번째로 맡은 일은 알루미늄 팬을 닦는 일이었다.  각종 고기가 달라붙고 기름기가 잔뜩 낀 여러 가지 모양의 냄비가 설거지 하는 곳에 쏟아져 들어왔다.  식당은 수백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으며 손님도 무척 많았다.  오후 3시 15분에 곧바로 버스를 타고 식당에 도착하면 4시 20분이었다.  하얀 가운으로 갈아입고 나가면 산더미처럼 팬이 쌓여 있었다.  

나는 50대 독일여자인 그 보스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보스는 인내심이 많았다.  파리한 몸매로 산더미처럼 쌓인 냄비 속에 묻혀서 땀을 뻘뻘 흘리는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사람처럼 꾀를 낼 줄도 몰랐다는 행동 하나로 여러 가지 실수를 너그럽게 보아주었다.  남들은 10시 30분이면 자신이 맡은 일을 모두 끝내고 퇴근했지만 일에 서투른 나는 밤 11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그러나 보스는 투덜대거나 불편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내가 일을 다 끝낼 때까지 안 보이는 곳에서 기다려주었다.  그 당시에 나는 피곤이란 무엇인지도 몰랐다.

집에 가는 마지막 버스는 밤 11시 10분에 출발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넘기는 적이 많았다.  금문교 다리 아래로부터 밤안개가 거슬러 올라오는 그 시간에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가 전화를 하면 어머니는 차를 몰고 나를 태우러 왔다.   군데군데 가로등만 서 있는 광장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  이미 나는 고독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일하고 난 후의 가슴은 허전함만 감돌았다.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가 멀리 해변을 돌아서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전조등만큼 마음은 외로웠다.  왜 어머니는 싸늘하게 나를 대했는지 몰랐다.  피곤함에 후들거리는 다리와 텅 빈 가슴을 어머니의 품속에 던지지 않으면 어디에 던진단 말인가, 그리움이 확 몰려왔다.

하얀색 스테이션웨곤이 내 앞에 서고 나는 차의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는다.  그 창백함과 싸늘함,  앞좌석에 나란히 앉은 어머니와 나의 사이에는 남극의 빙산이 가로막혀 있었다.  안개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차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어머니는 가끔 차를 거칠게 몰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의 분노를 눈치 챘다.  안타깝기만 자식에게 마음대로 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였으며 내 아버지에 대한 울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존재에 대한 분노도 따랐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는 말없이 엉클이 자는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고개 숙인 채 내 방으로 향했다.  벌써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또 일어나야 한다.  침대에 누우면 몸이 둥둥 떠서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머니와 나는 엇갈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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