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아침, 8시경,
나를 실은 비행기는 샌프란시스코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파란 태평양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 자리한 공항은 무척 컸다.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일본 하네다공항에서 경악한 나는 샌프란시스코국제공항에서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너무도 넓은 공항에는 팜암민항기, 노스웨스트민항기, 이외에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비행기가 쭉 널려있었다. 역시 역사는 힘의 결전장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며, 일본은 미국과 전쟁하여 졌다. 공항의 크기로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힘의 역사였다.
155센티의 단아한 모습, 파마한 머리에 커다란 눈, 위아래로 빨간 색 줄무늬가 있던 투피스를 입고 앞서 걸었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비행기 좌석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졸졸 따라 나갔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 비행기 안에는 큰 복도가 쭉 있었고 사람들은 그 복도를 걸어가는 것이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비행기 출입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커다란 광장 같은 대합실에 우뚝 선 나는 방황했다. 도대체 비행기 안에 이렇게 큰 홀이 어디에 있었던가,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얼른 뛰어가서 창밖을 보니 내가 탔던 비행기는 저쯤에 있었고 출입구에는 긴 이동식 복도가 딱 붙어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황당했던 기억으로부터 미국생활은 시작되었다.
문화충격은 칼라로부터 왔다. 흑백세계에서 칼라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금발머리, 갈색머리, 빨간색머리, 회색머리를 뒤집어쓴 사람들, 그리고 파란 눈, 갈색 눈, 회색 눈을 달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이빨만 하얀 흑인들이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이야기 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온 양반집 자손은 박박 깎은 머리통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당시에 한국에서는 고관도 타 보지 못하는 커다란 제네랄 모터스에서 나온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엉클은 어머니를 옆에 태우고 나를 뒷좌석에 태웠다.
샌프란시스코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다. 판잣집만 다닥다닥 붙었던 1969년도의 한국, 기껏 십 층도 안 되는 빌딩이 제일 큰 건물이라고 서울의 명동에서 뽐내던 시절이었으니 잘 정돈된 샌프란시스코는 실로 낙원 같은 도시였다. 자동차는 도시를 가로질러 금문교가 보이는 언덕을 돌고 있었다. 태평양을 바라보는 금문교 위에 바로 서부해안을 담당하는 미군기지가 있었고 어머니와 엉클은 영내의 관사에 살고 있었다.
1515 Pershing Dr. S.F 94129. U.S.A
이것이 내가 살던 관사의 주소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며 이층으로 지어진 관사는 무척 넓었다. 약 60평은 족히 되는 이층으로 지어진 주택이었으니 한옥에서 친척과 바글바글 모여 살던 나는 궁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미군과의 사이에서 난 어머니의 자식은 딸 세 명에 아들이 둘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 곳에서 제일 큰 아들에 속했다. 성이 다른 동생들은 나를 빙 둘러싸고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뭐라고 자꾸 말을 걸었고 어머니는 나 대신에 대답을 해 주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군에게 어머니가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꼭 어머니를 안트라고 불렀으며, 계부인 미군을 엉클이라고 불렀다. 혹시 내가 어머니의 친자식이라고 밝혀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을 갖기도 했다. 꿈에도 그리웠던 어머니를 만나고 보니 어머니는 자기를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용납 않는 나의 고지식함이 버티고 있었다. 만천하에 떳떳하게 드러내도 좋은 내 신분을 숨겨야 한다는 현실이 산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어머니를 왜 아줌마라고 불러야 하는가......
나는 다너라는 9살 난 동생과 같이 방을 썼다. 아이들에게는 내가 언제나 화젯거리로 등장했다. 겨우 삐죽삐죽 자라기 시작한 밤송이 같은 머리털, 엉성한 발걸음,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짓던 멍한 표정, 다섯 아이들은 미개한 나라에서 온 소년이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고, 모이면 내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에게 나의 이상한 점만 골라서 흉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비수였다. 가장 안타까운 자식이 놀림을 당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몰아쳤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목욕을 꼭 하라고 했다. 동양인에게는 냄새가 난다는 이유였다. 식사한 후에는 꼭 양치질하여 마늘냄새를 없앨 것이며 걸음걸이도 미국아이들처럼 또박또박 걸으라고 했다. 나는 미국식에 적응하기 보다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최초로 야단맞은 일은 커피 때문이었다. 아이들 많은 집안에서 단 둘이 있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주방에서 어머니는 커피를 타는 나에게 야단을 쳤다. 커피를 먼저 스푼으로 떠 넣고 난 다음에 설탕을 뜨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하얀 설탕 틈에 까만 커피가루가 떨어지면 지저분하다고 했다. 지금도 나는 커피를 탈적에 설탕부터 꼭 먼저 뜬다. 그리고 커피를 뜬다. 편하게 말해도 될 것을 야단까지 치며 말하는 어머니는 내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나는 집에서 재치가 있지도 않았고 눈치가 빠르지도 않았다. 최소한도 매사에 기가 죽어있는 집에서만큼은 그랬다. 왜냐하면 그 후에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식당이나 학교에서는 내가 무척 눈치 빠르고 명랑한 소년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어머니가 알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싫어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아니니?” 물론 그 말의 이면에는 어머니의 어떤 콤플렉스가 깔려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죄책감과 열등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자식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다는 점, 남들에게 양공주라는 말을 듣는다는 점, 나의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는 점, 등등이 바로 어머니의 숨겨진 슬픔이었고, 그것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나를 덮치기도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극과 극을 달렸다. 따듯함은 느낌이다. 나는 운전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만 보아도 그 품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는 나를 차이나타운에 있는 영어회화학교에 입학시켰다. 세 달 코스인 이곳은 중국인들만 위한 곳이었지만 아는 사람을 통하여 입학했고 메일 몇 시간씩 English 900 이라는 영어회화 교재를 공부했다. 매일 차로 나를 데려다 주었으며 어떤 때에는 교실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좋았다. 가끔 엉뚱한 영어를 갖다 붙이며 더듬거리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마구 웃곤 했다. 그 표정에는 비로소 한국여자로서 토종인 한국의 자식을 마주대한다는 어떤 편안함도 엿보였다. 같이 차이나타운을 다니면서 한국음식과 가장 가까운 중국음식을 나에게 사 주었다. 또한 일본인을 위한 매장에서 라면이나 단무지를 사서 내 식탁을 따로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바로 어머니의 가슴 속에 묻혔던 아픔이 폭발할 때에는 실로 감당키 어려운 싸늘함을 보였다. 동그랗게 뜬 눈에 비친 흔들리던 눈동자, 빨갛게 달아오른 뺨과 앞뒤가 바뀌는 말투, 그것은 슬픔의 격류였다. 얼어붙었던 가슴이 내뿜는 냉혹한 찬바람이었다.
사실 나는 문화충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 가족이 이민을 가도 가정만큼은 이방인의 나라가 아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한국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가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한국식으로 음식을 먹고 행동한다. 밖에서 문화충격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들어오면 한국식 문화로 치료하는 공간이 유지된다. 그러나 나는 상처를 치유할 공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다섯 아이들에 쫓기다시피 살았고 나와 둘이서 대화할 시간조차도 뜸했다. 나는 하루아침에 떨어진 미국집안의 분위기에 당황했다. 눈을 뜨면 굿모닝이라고 영어로 인사해야 하며 우유와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저녁이면 비후스텍을 앞에 놓고 칼질했다. 또한 다섯 아이들의 극성 틈에서 벙어리처럼 더듬거렸다.
혼란에 빠진 나는 점점 뒷걸음질 쳤다. 아이들을 피하여 밖을 배회하고 엉클의 파란 눈을 볼 때마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탄로 날 까봐 조마조마했으며, 동양인이라고 놀림을 당할 까봐 사람들의 눈에 안 띄려고 노력했다. 금문교 다리 아래에 조그만 해변이 있다. 태평양의 파도가 거대하게 밀려와서 바위에 부딪쳐 부셔졌다. 그 바위 위가 내 보금자리였다. 멀리 떠나는 배를 보며 한국을 그리워했고 밀려오는 파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Homesick. 바로 향수병이었다.
하얀 천으로 덮인 침대에 누워 잠들면 곧바로 고향땅으로 달렸다. 외할머니의 따듯한 손길, 이모님이 차려주던 김치찌개, 밤이면 창가에서 나를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 다니던 골목길, 학교, 등등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나는 주인공이 되어 뛰어 놀았다. 그러다가 새벽에 눈을 떴다. 하얀 침대와 담요, 저쪽 구석에는 갈색머리의 9살 난 동생이 잠들어 있다. 미국사람의 집안에서 잠을 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 놀라서 벌떡 일어나면 눈물이 그냥 흘러내렸다. 울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뺨을 타고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계속)
나를 실은 비행기는 샌프란시스코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파란 태평양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 자리한 공항은 무척 컸다.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일본 하네다공항에서 경악한 나는 샌프란시스코국제공항에서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너무도 넓은 공항에는 팜암민항기, 노스웨스트민항기, 이외에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비행기가 쭉 널려있었다. 역시 역사는 힘의 결전장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며, 일본은 미국과 전쟁하여 졌다. 공항의 크기로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힘의 역사였다.
155센티의 단아한 모습, 파마한 머리에 커다란 눈, 위아래로 빨간 색 줄무늬가 있던 투피스를 입고 앞서 걸었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비행기 좌석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졸졸 따라 나갔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 비행기 안에는 큰 복도가 쭉 있었고 사람들은 그 복도를 걸어가는 것이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비행기 출입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커다란 광장 같은 대합실에 우뚝 선 나는 방황했다. 도대체 비행기 안에 이렇게 큰 홀이 어디에 있었던가,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얼른 뛰어가서 창밖을 보니 내가 탔던 비행기는 저쯤에 있었고 출입구에는 긴 이동식 복도가 딱 붙어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황당했던 기억으로부터 미국생활은 시작되었다.
문화충격은 칼라로부터 왔다. 흑백세계에서 칼라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금발머리, 갈색머리, 빨간색머리, 회색머리를 뒤집어쓴 사람들, 그리고 파란 눈, 갈색 눈, 회색 눈을 달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이빨만 하얀 흑인들이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이야기 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온 양반집 자손은 박박 깎은 머리통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당시에 한국에서는 고관도 타 보지 못하는 커다란 제네랄 모터스에서 나온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엉클은 어머니를 옆에 태우고 나를 뒷좌석에 태웠다.
샌프란시스코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다. 판잣집만 다닥다닥 붙었던 1969년도의 한국, 기껏 십 층도 안 되는 빌딩이 제일 큰 건물이라고 서울의 명동에서 뽐내던 시절이었으니 잘 정돈된 샌프란시스코는 실로 낙원 같은 도시였다. 자동차는 도시를 가로질러 금문교가 보이는 언덕을 돌고 있었다. 태평양을 바라보는 금문교 위에 바로 서부해안을 담당하는 미군기지가 있었고 어머니와 엉클은 영내의 관사에 살고 있었다.
1515 Pershing Dr. S.F 94129. U.S.A
이것이 내가 살던 관사의 주소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며 이층으로 지어진 관사는 무척 넓었다. 약 60평은 족히 되는 이층으로 지어진 주택이었으니 한옥에서 친척과 바글바글 모여 살던 나는 궁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미군과의 사이에서 난 어머니의 자식은 딸 세 명에 아들이 둘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 곳에서 제일 큰 아들에 속했다. 성이 다른 동생들은 나를 빙 둘러싸고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뭐라고 자꾸 말을 걸었고 어머니는 나 대신에 대답을 해 주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군에게 어머니가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꼭 어머니를 안트라고 불렀으며, 계부인 미군을 엉클이라고 불렀다. 혹시 내가 어머니의 친자식이라고 밝혀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을 갖기도 했다. 꿈에도 그리웠던 어머니를 만나고 보니 어머니는 자기를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용납 않는 나의 고지식함이 버티고 있었다. 만천하에 떳떳하게 드러내도 좋은 내 신분을 숨겨야 한다는 현실이 산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어머니를 왜 아줌마라고 불러야 하는가......
나는 다너라는 9살 난 동생과 같이 방을 썼다. 아이들에게는 내가 언제나 화젯거리로 등장했다. 겨우 삐죽삐죽 자라기 시작한 밤송이 같은 머리털, 엉성한 발걸음,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짓던 멍한 표정, 다섯 아이들은 미개한 나라에서 온 소년이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고, 모이면 내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에게 나의 이상한 점만 골라서 흉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비수였다. 가장 안타까운 자식이 놀림을 당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몰아쳤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목욕을 꼭 하라고 했다. 동양인에게는 냄새가 난다는 이유였다. 식사한 후에는 꼭 양치질하여 마늘냄새를 없앨 것이며 걸음걸이도 미국아이들처럼 또박또박 걸으라고 했다. 나는 미국식에 적응하기 보다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최초로 야단맞은 일은 커피 때문이었다. 아이들 많은 집안에서 단 둘이 있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주방에서 어머니는 커피를 타는 나에게 야단을 쳤다. 커피를 먼저 스푼으로 떠 넣고 난 다음에 설탕을 뜨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하얀 설탕 틈에 까만 커피가루가 떨어지면 지저분하다고 했다. 지금도 나는 커피를 탈적에 설탕부터 꼭 먼저 뜬다. 그리고 커피를 뜬다. 편하게 말해도 될 것을 야단까지 치며 말하는 어머니는 내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나는 집에서 재치가 있지도 않았고 눈치가 빠르지도 않았다. 최소한도 매사에 기가 죽어있는 집에서만큼은 그랬다. 왜냐하면 그 후에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식당이나 학교에서는 내가 무척 눈치 빠르고 명랑한 소년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어머니가 알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싫어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아니니?” 물론 그 말의 이면에는 어머니의 어떤 콤플렉스가 깔려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죄책감과 열등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자식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다는 점, 남들에게 양공주라는 말을 듣는다는 점, 나의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는 점, 등등이 바로 어머니의 숨겨진 슬픔이었고, 그것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나를 덮치기도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극과 극을 달렸다. 따듯함은 느낌이다. 나는 운전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만 보아도 그 품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는 나를 차이나타운에 있는 영어회화학교에 입학시켰다. 세 달 코스인 이곳은 중국인들만 위한 곳이었지만 아는 사람을 통하여 입학했고 메일 몇 시간씩 English 900 이라는 영어회화 교재를 공부했다. 매일 차로 나를 데려다 주었으며 어떤 때에는 교실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좋았다. 가끔 엉뚱한 영어를 갖다 붙이며 더듬거리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마구 웃곤 했다. 그 표정에는 비로소 한국여자로서 토종인 한국의 자식을 마주대한다는 어떤 편안함도 엿보였다. 같이 차이나타운을 다니면서 한국음식과 가장 가까운 중국음식을 나에게 사 주었다. 또한 일본인을 위한 매장에서 라면이나 단무지를 사서 내 식탁을 따로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바로 어머니의 가슴 속에 묻혔던 아픔이 폭발할 때에는 실로 감당키 어려운 싸늘함을 보였다. 동그랗게 뜬 눈에 비친 흔들리던 눈동자, 빨갛게 달아오른 뺨과 앞뒤가 바뀌는 말투, 그것은 슬픔의 격류였다. 얼어붙었던 가슴이 내뿜는 냉혹한 찬바람이었다.
사실 나는 문화충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 가족이 이민을 가도 가정만큼은 이방인의 나라가 아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한국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가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한국식으로 음식을 먹고 행동한다. 밖에서 문화충격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들어오면 한국식 문화로 치료하는 공간이 유지된다. 그러나 나는 상처를 치유할 공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다섯 아이들에 쫓기다시피 살았고 나와 둘이서 대화할 시간조차도 뜸했다. 나는 하루아침에 떨어진 미국집안의 분위기에 당황했다. 눈을 뜨면 굿모닝이라고 영어로 인사해야 하며 우유와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저녁이면 비후스텍을 앞에 놓고 칼질했다. 또한 다섯 아이들의 극성 틈에서 벙어리처럼 더듬거렸다.
혼란에 빠진 나는 점점 뒷걸음질 쳤다. 아이들을 피하여 밖을 배회하고 엉클의 파란 눈을 볼 때마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탄로 날 까봐 조마조마했으며, 동양인이라고 놀림을 당할 까봐 사람들의 눈에 안 띄려고 노력했다. 금문교 다리 아래에 조그만 해변이 있다. 태평양의 파도가 거대하게 밀려와서 바위에 부딪쳐 부셔졌다. 그 바위 위가 내 보금자리였다. 멀리 떠나는 배를 보며 한국을 그리워했고 밀려오는 파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Homesick. 바로 향수병이었다.
하얀 천으로 덮인 침대에 누워 잠들면 곧바로 고향땅으로 달렸다. 외할머니의 따듯한 손길, 이모님이 차려주던 김치찌개, 밤이면 창가에서 나를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 다니던 골목길, 학교, 등등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나는 주인공이 되어 뛰어 놀았다. 그러다가 새벽에 눈을 떴다. 하얀 침대와 담요, 저쪽 구석에는 갈색머리의 9살 난 동생이 잠들어 있다. 미국사람의 집안에서 잠을 자던 나를 발견하는 순간, 놀라서 벌떡 일어나면 눈물이 그냥 흘러내렸다. 울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뺨을 타고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