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엊그제 내린 눈이 녹지 않은 겨울 강은 하얀엽서 같다
얼음 속을 비집고 나와 눈밭에 드러누운 겨울나무의 벗은 알몸이 매혹적이다
질펀하다거나 농염하기보다는 정갈하고 단아하다
휘어지고 틀어지면서도 균형을 잡아가며 함부로 가지를 뻗지 않고 욕망을 다스리는 모습에서
나무의 기품을 읽는다
굵고 가는 선율 따라 떨리는 몸 끝이 그린 한 생의 잔영은 노련 화가가 붙 끝으로 그려낸 한 폭의
담채화다
발 묶인 나무를 위하여 하늘은 바람을 풀어 놓는다던가
푸른 나무 그림자 사이로 겨울 강바람이 살랑이며 드나든다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 나무는 발부리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을까
다가오고 떠나는 것들의 끈질긴 유혹을 참아내려 겨우 내내 찬물에 담금질을 하고 섰는 여리고도
강인한 목숨, 그 긴 기다림 안에 외로움이 산다
그 외로움으로 나무는 꽃을 피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긴 적요는 무심함이 되고 너무 깊은 슬픔은 눈물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지나간 시간 속에 굳어버린 아련한 기억의 편린들, 얼음 위에 나무는 그래서 푸르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막막하게 강가를 서성일 때 그 때도 나무는 큰 키로 서서 말없이 나를 맞아 주었다
살아온 세월만큼 침묵으로 말할 줄 아는 연인 같은 친구처럼 나무는 늙어도 늙지 않고 늙을수록
더 아름답다
이만큼 삶을 살아도 바람처럼 자유로울 수 없고 바위처럼 단단해 질 수 없다면 차라리 한적한
강가에 나무로 서서 갈 길 묻는 나그네의 좌표가 되어도 좋겠다
“첨벙”
물오리 한 마리가 강물을 가르고 간다
중심에서 밀려난 물결이 둥글게 손을 잡고 소리 없이 바깥으로 바깥으로 밀려가고 강물 속에 드리워있던
나뭇가지들도 수묵 번지는 화선지처럼 조용히 흔적을 지워가고 있다
진하고 굵고 화려했던 선들도 막상 가장자리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방으로 떠밀려나 있는 나의 삶도 강 물결처럼 저렇게 저물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글 사진 /돌배나무 김용민 ( 사진촬영. 양수리)
위 세번째 사진은 마치 반추상화 같습니다.
실물의 행방이 묘연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