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원 digital 200 mm
12월 연밭에서
한바탕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던 구름들이 말끔하게 걷히고
청명한 하늘엔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몇 점 드문드문 기억처럼 남아있다
물그림자가 만든 나무 위에 햇살이 고르게 내려앉는다.
연못의 물방울들이 짧고 강렬한 스타카토의 은빛 햇살을 퉁겨낸다
강 건너 산등성에서 건너와 추상화처럼 서 있는 연꽃 잔대사이를 들개처럼
어슬렁거리는 바람,
겨울의 연밭은 거대한 무덤 같다
허리를 꺾고 죽어 있는 것들 그리고 죽어 가는 것들 .....
성장을 멈춰버린 잿빛의 생명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체념이거나 아니면
돌처럼 단단해져야 하는 잔혹한 견딤뿐이다
물속에 머리를 박고 서서 어떻게든 내면 봄에 새로운 싹을 틔워보려 궁리중인
한 생명의 고요한 집중이 눈물겹다
또 다시 12월,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온 우편물처럼 느닷없이 연말이 내 앞에 왔다
새삼 시간에 예민해져서 그 동안 내 몸을 지나 멀리 가버린 시간들을 돌아본다
아, 내가 지금 여기에 있구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겨울이면 자연에게 받은 몸을 다시 되돌려 주고 가는 것처럼
12월의 잿빛 풍경이 이제 차츰 몸을 비우고 가벼워져야 할 때임을 일러준다
삶은 시간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완만한 흐름이다
이 예측 할 수 없는 미지의 여행에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은 사랑의 힘이다
저 연꽃 잔대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며 버티는 것처럼.....
사랑을 잃어버린 생명에게는 체념과 황무지와 같은 막막함이 있을 뿐 내일은
없는 것, 그래서 사랑은 목마름이며 살아야 할 이유며 그리움이며 꿈인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
마음의 소란을 가라앉히고 이제 나의 묵은 틀 너머 먼 곳으로 내면의 여행을
떠나야겠다
낮선 내일을 향해 떠나는 길고도 먼 삶의 여행...
김 용 민
은빛햇살과 함께 느껴지는 '고요'가 참 좋아요.
새삼 하나 느꼈네요.
사실 어떻게든 새로운 싹을 틔워보려 궁리중인 제게도,
고요가 필요다는걸. 맞아요. 매우 필요하다는 걸..
ㅎㅎ용민씨, 이케 동떨어진 얘길 해서
용민씨의 힘을 쫘~악 빼놓는 건 아닐까요?
어쨌든 용민씨의 내면여행이 더욱 다채롭고 햇살이 가득하기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