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에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웃을 때마다 새겨졌을
눈가의 잔주름과 우울하고 슬플 때 그어진 계급장 같은 이마의 자국들,
이젠 거의 빈틈없을 만큼 가득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세월을 덧없이 흐르는 물에 비유합니다만 그러나 세월은 물과 다르게
얼굴에 골 깊은 금을 새기며 지나갑니다.
주름 안쪽의 깊게 패여진 곳이 나를 만들고 나와 함께 늙어온 시간의 흔적이라고
자위해 보다가도 오늘처럼 힘겹게 하루를 보낸 날이면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느 날 문득 나이를 의식하고 세월의 덧없음에 돌부리에 발이 걸리듯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나를 발견 하고는 합니다
사회에서는 “정년”이 되고 집안에서마저 가장의 권위에서 조끔씩 밀려나게
되면서 지금까지 당당하게 걸어온 나와 현재의 초라해진 나를 비교해 보면서
가슴 먹먹해 하는 날이 잦아집니다
가지고 있던 많은 가능성들도 이젠 거의 다 소진해 간다는 생각도하면서 말입니다
출발은 별반 다를 바 없었으나 이미 지위가 달라진 친구들을 보면서 새삼
젊었을 적 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에 가슴앓이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다른 불만이나 부족함이 없이 살아 온 사람일지라도 나이가 들어 뒤
늦게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다거나 이쯤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는 것을 봅니다
무릇 거울이란 자신의 모습을 되비춰 주는 것이지만 그 곳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선뜻 자신임을 긍정하기는 쉽지 않겠지요
거울에 보이는 자신의 현실적 반사상과 평소에 생각하던 이상적 자아 사이에는
조금씩 틈이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
현재의 내가 아닌 다른 실존이 일으키는 환시, 혼자 있을 때 그 모습은 더 선명해
집니다
넋 놓고 앉았다가 괜스레 마음만 무거워 졌습니다
잠시 전 유리창 속에 있던 나는 어느새 저 만치 가버리고 없는데 말입니다
날마다 일어서는 생각들 , 생을 마감 할 때는 모두 버리고 가는 것이라 했는데
마음은 늘 이토록 무겁게만 느껴지는지요
지식은 채우는 것이고 지혜는 덜어내고 비우는 일이라는 옛말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덜어내고 비우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만을 선택하는 일,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것들은 다 벗어버리면 나는 얼마나 가벼울까요
만약에 내게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삶이 모두 하얀 캐버스 같은 빈 여백
이라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일까요.
등산을 할 때 두렵고 떨려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절벽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 이라고 합니다,
마음 안에 덕지덕지 붙은 티끌 같은 것들은 바람에게라도 주어 버리고 이제 부터는
조금 가벼워져야 겠습니다
이제는 모기떼처럼 따라오는 달력 속의 숫자들을 외면하고 유유자적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